소개
Calypso · 사라진 풍습· 공유받은 글

오라이를 외치던 손이 도둑이 됐다

1966년 가을, 서울. 열여덟 살 버스 안내양이 합숙소에서 옷이 벗겨진 채 수색당했다. 현금 200원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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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 1

안내양의 손이 매일 밤 의심받았다

1970년대 서울. 버스가 멈추면, 문에 매달린 소녀가 버스 옆구리를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탕, 탕.

오라이!
‘출발해도 좋다’는 안내양의 신호. 일본을 거쳐 들어온 영어 all right에서 왔다

‘오라이’는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한국의 아침에서 가장 익숙한 소리였다. 버스 한 대에 안내양 한 명. 요금을 받고, 문을 여닫고, 만원버스에 사람을 밀어 넣었다.

버스 요금을 한 푼씩 받아낸 건 안내양의 손이었다. 그런데 하루가 끝나는 정산 시간마다, 같은 손이 도둑으로 의심받았다. 왜였나.

CH. 2

열여덟 소녀들이 서울로 올라왔다

1961년, 정부가 버스 안내원을 모두 여성으로 바꿨다. 요금함이 없던 시절, 돈을 받을 사람의 손이 필요했다.

안내양이 된 건 대부분 지방에서 올라온 소녀들이었다. 평균 나이는 열여덟이었다. 서울에 도착한 소녀들은 받은 돈을 집으로 부쳤다.

열여덟 살 소녀가 하루 열여덟 시간을 버스에 매달려 보냈다. 1975년 서울시 조사로는 하루 노동이 열여덟 시간 이십칠 분, 잠은 네 시간 반이었다.

안내양 한 달 월급 (1970년대)
15,000
1974년 최고치 기준, 짜장면 일흔다섯 그릇 값이었다
CH. 3

안내양들은 동전 몇 개를 숨겼다

월급으로는 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떤 안내양은 받은 요금 가운데 동전 몇 개를 신고하지 않고 주머니에 넣었다.

사람들은 삥땅이라 불렀다. 들키면 도둑이었다. 그래도 동전 몇 개가 없으면 끼니를 거르거나 집에 돈을 못 부쳤다.

저는 정말 죄인입니까? 영원히 교회와 등져야 합니까?
1970년경, 한 열아홉 살 버스 안내양

회사가 삥땅을 막으려고 택한 방법은, 안내양의 몸이었다.

CH. 4

회사는 안내양을 벗겨 수색했다

정산 때 입금액이 감시원이 센 승객 수와 맞지 않으면, 모자란 돈은 안내양 월급에서 깎였다. 그리고 몸수색이 시작됐다.

여사감이 안내양을 방으로 데려가 옷을 벗기고 뒤졌다. 어떤 회사는 돈을 못 숨기게 안내양들의 주머니를 아예 찢어 못 쓰게 만들었다.

1966년 10월, 동화여객의 열여덟 살 안내양이 합숙소에서 옷이 벗겨진 채 수색당했다. 나온 돈은 200원이었다. 다음 날, 안내양은 세상을 떠났다.

이런 상황에서 삥땅은 죄악이 아니다.
지학순 주교, 1970년 ‘삥땅 심포지엄’에서

안내양들은 이미 1963년부터 일을 멈추고 거리로 나서기도 했다. 여성 노동자 가운데 가장 일찍 맞선 축이었다. 그래도 검신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CH. 5

기계가 현금을 세자 안내양이 사라졌다

1982년, 버스에 요금함과 하차벨, 자동문이 달리기 시작했다. 승객이 직접 돈을 넣고, 벨을 누르고, 문이 알아서 열렸다.

현금을 손으로 받을 사람이 필요 없어지자, 삥땅도 검신도 함께 사라졌다. 그리고 안내양도 사라졌다.

마지막 버스 안내양
38
1989년 4월, 김포교통 130번 버스. 1990년부터 안내양 제도는 법에서 지워졌다

서른 해 가까이 한국의 아침을 깨우던 ‘오라이’ 소리는, 1989년에 멈췄다.

— 끝 —
카톡 한 줄

버스 안내양이 사라진 건 자동문 때문이 아니라, 안내양을 매일 도둑으로 몰던 현금을 기계가 대신 세기 시작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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