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을 가둔 아버지가 이름을 지었다
1762년 윤5월 13일, 창경궁. 영조가 하나뿐인 아들을 뒤주에 가두고 자물쇠를 채웠다. 여드레가 걸렸다.
여드레 만에 외아들이 죽었다
아들을 가둔 아버지가 이름을 지었다
1762년 윤5월 13일, 창경궁. 영조가 하나뿐인 아들을 뒤주에 가두고 자물쇠를 채웠다. 여드레 만에 아들이 숨졌다.
조선 21대 임금 영조가, 다음 왕이 될 외아들을 손수 가뒀다. 같은 아버지가 아들의 죽음 뒤에 한 일은 따로 있었다.
영조는 무수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영조의 어머니는 궁궐에서 물을 긷던 무수리, 숙빈 최씨였다. 임금이 된 뒤에도 영조는 핏줄이 천하다는 말과, 선왕 경종을 독살했다는 의심을 함께 짊어졌다.
정통성이 약한 임금은 흠 없는 후계자가 필요했다. 영조는 하나뿐인 아들에게 완벽을 요구했다.
사도는 활쏘기와 글, 그림에 두루 능했다. 다만 한 가지, 사도는 아버지가 바라는 아들이 되지 못했다.
영조는 아들을 서인으로 낮췄다
1762년, 나경언이 세자의 허물을 조목조목 적어 영조에게 올렸다. 영조는 아들을 뜰에 불러 세웠다.
영조가 내세운 가장 큰 명분은 세자의 병이 아니었다. 사도의 생모 영빈 이씨가 임금을 찾아가, 종사와 세손을 지키려면 세자를 처분해 달라고 고했다.
윤5월 13일, 영조는 사도를 폐해 서인으로 낮추고 뒤주에 가뒀다. 영조가 직접 뚜껑을 닫고 자물쇠를 채웠다.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이었다.
윤5월 21일, 사도가 뒤주에서 죽었다
뒤주는 한여름 휘령전 앞에 놓여 있었다. 1762년 윤5월 21일, 갇힌 지 여드레 만에 사도가 숨졌다.
사도가 죽자 영조는 곧바로 세자의 자리를 되돌려 주었다. 이어 시호를 손수 지었다. 사도(思悼) — 잘못을 거듭 뉘우친다는 '思', 일찍 죽어 슬프다는 '悼'.
아들을 가둔 임금이, 죽은 아들의 이름에 자신의 뉘우침을 새겼다. 영조가 남긴 것은 시호 두 글자였다.
1776년, 사도의 아들이 왕이 됐다
사도가 죽고 열네 해 뒤, 1776년 4월 27일. 사도의 아들이 조선 22대 임금 정조로 즉위했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할아버지 영조는 손자에게 사도를 추숭하지 말라 일렀다. 정조는 아버지의 무덤을 수원으로 옮기고, 무덤 곁에 화성을 쌓았다. 영조가 뉘우침을 담아 지은 두 글자는, 사도의 아들이 평생 안고 간 이름이 됐다.
'사도세자'의 사도(思悼)는, 아들을 뒤주에 가둔 아버지 영조가 '잘못을 뉘우치며 슬퍼한다'는 뜻으로 손수 붙인 시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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