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밤 12시에 사라졌다
1982년 1월 5일 밤 12시, 서울. 36년 동안 매일 밤 사람들을 집으로 쫓던 사이렌이 멈췄다.
자정마다 나라가 멈췄다
매일 밤, 같은 사이렌
밤 11시. 서울의 거리는 매일 밤 전쟁이었다. 자정 전에 집에 닿지 못하면, 그 밤은 경찰서에서 보내야 했다. 12시가 되면 거리마다 사이렌이 울렸고, 철제 바리케이드가 길을 막았다.
사이렌은 36년 동안 거의 매일 밤 울렸다. 1982년 1월 5일 밤, 처음으로 울리지 않았다.
1945년, 미군이 통금을 깔았다
1945년 9월 8일, 미군이 인천에 상륙했다. 같은 날 미군정의 명령이 내려왔다. 서울과 인천은 밤 8시부터 새벽 5시까지 통행이 금지됐다.
전쟁이 지나고 통금은 전국으로 퍼졌다. 1961년부터는 자정부터 새벽 4시까지로 굳었다. 매일 밤 4시간씩, 사람들은 집 안에 갇혔다.
처음엔 임시 조치였다. 그러나 한 해, 또 한 해, 통금은 밤의 일부가 됐다. 사이렌에 맞춰 잠들던 아이들이 자라 어른이 됐다. 어른들은 11시 반이면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랑 노래 한 곡도 통금 앞에서 멈췄다. 1971년 배호가 부른 〈영시의 이별〉은 금지곡이 됐다. 자정에 헤어진다는 가사가 통금을 어기게 만든다는 이유였다.
출산도 통행증이 필요했다
통금은 법이었다. 그러나 밤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자정이 지나 아기가 나오려 했고, 자정이 지나 노인이 길에서 쓰러졌다.
그래서 통금에도 예외는 있었다. 출산, 질병, 초상 같은 불가피한 일에는 통행증이 나왔다. 급한 환자를 옮기는 사람은 사정을 말하면 대체로 통과시켜 줬다.
예외에 들지 못한 사람은 달랐다. 통행증 없이 자정 거리에서 붙잡히면 거동수상자로 파출소에 끌려갔다. 통금이 풀리는 새벽 4시까지 유치장에서 밤을 보내야 했다.
통금 앞에서 사람들은 따지기를 그만뒀다. 한 세대가 자정을 사이렌에 맞춰 살았다. 자정은 묻는 시각이 아니라, 넘을 수 없는 벽이 됐다.
올림픽이 통금을 풀었다
36년 동안 통금이라는 벽은 누구의 사정으로도 무너지지 않았다. 산모도, 노인도, 연인도 벽을 허물지는 못했다. 통금을 끝낸 건 누군가의 딱한 사정이 아니었다.
1981년 9월 30일, 서독 바덴바덴. 사마란치가 1988년 올림픽 개최지로 '서울'을 발표했다. 36년 만에 처음으로, 통금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문제는 분명했다. 전 세계에서 올 손님을 밤 12시에 집 안으로 가둘 수는 없었다. 올림픽을 치르려면 통금을 풀어야 했다.
통금이 어떤 벽이었는지는 하늘이 보여줬다. 밤늦게 김포공항에 못 내린 국제선 비행기는 일본으로, 홍콩으로, 하와이로 되돌아갔다. 사람을 태운 비행기가 나라 하나를 통째로 비켜 갔다.
1981년 12월, 국회가 통금 해제안을 통과시켰다. 시행일은 1982년 1월 5일로 정해졌다.
사람들이 거리에 서 있었다
1982년 1월 5일 밤 12시. 36년 동안 거의 매일 울리던 사이렌이 울리지 않았다.
거리를 막던 바리케이드도 없었다. 평생 자정 전에 뛰어 들어가던 사람들이, 자정이 지난 거리에 그냥 서 있었다. 갈 곳이 있어서가 아니라, 자정 거리에 서 있어도 되는 게 처음이라서였다.
36년을 가둔 벽은 누군가 불쌍해서 풀린 게 아니었다. 세계가 보러 오기로 했기 때문에 풀렸다.
1982년 1월 5일 이후, 한국의 밤 12시는 더 이상 나라가 멈추는 시각이 아니었다.
한국의 밤 12시가 36년 만에 열린 건, 시민이 불쌍해서가 아니라 올림픽 때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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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야간통행금지 (발령 근거=미 제24군 사령관 일반명령, 출산·질병·사상=통행증 예외사유, 해제=국무회의 의결)
- 국가기록원 — 야간통행금지와 해제 (36년 4개월, 1945.9.8~1982.1.5)
- 나무위키 — 야간 통행금지 (거동수상자 체포·유치장·즉결심판, 응급은 관행상 통과)
- 머니투데이 — 뉴스속오늘(2024-01-05): 범칙금 2천원(1979)·공항 운항금지 밤 9시~오전 7시
- 머니투데이 — 뉴스속오늘: 사이렌 사라진 그날
- ㅍㅍㅅㅅ — 1982년 36년간의 야간통행금지 폐지 (항공기 회항: 일본·홍콩·하와이)
- 농민신문 — [그 노래 그 사연] 배호 '영시의 이별' (1971, 통금 사유 금지곡)
- 위키백과 — 1988년 하계 올림픽 (1981.9.30 바덴바덴 IOC 총회 서울 확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