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임금의 어머니가 사약을 받았다
1482년 8월, 친정으로 쫓겨난 폐비 윤씨 앞에 사약이 놓였다. 그 여자가 낳은 아들이 다음 임금이었다.
사약 사발이 마당에 놓였다
1482년 8월, 한 사가의 마당
마당에 사약 한 사발이 놓였다. 사발 앞에 앉은 여자는 삼 년 전까지 이 나라의 왕비였다. 그가 낳은 아들은 다음 임금이 될 세자였다.
왕비가 폐위되는 일도 드물었지만, 폐위된 왕비에게 사약이 내리는 일은 더 드물었다. 게다가 사약을 내린 사람은 남편인 임금 성종이었다.
윤씨는 가난한 집 딸이었다
후궁으로 뽑히던 해
윤씨는 가난한 집에서 자랐다. 아버지 윤기견은 윤씨가 궁에 들기 전에 이미 죽었고, 집안에는 내세울 권세도 재산도 없었다.
1473년, 성종이 후궁을 들였다. 윤씨가 숙의로 뽑혔다. 뽑힌 까닭 하나가 든든한 친정이 없다는 점이었다. 외척이 설칠 걱정이 없는 여자라는 이유로, 궁은 윤씨에게 높은 점수를 줬다.
마침 성종에게는 뒤를 이을 아들이 없었다. 1474년 원비 공혜왕후가 일찍 세상을 떠나, 왕비 자리도 비어 있었다.
1476년, 윤씨가 성종의 아이를 가졌다. 같은 해 윤씨는 숙의에서 곧바로 왕비가 됐고, 아들 융을 낳았다. 가진 것 없던 집 딸이 나라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았다.
윤씨는 자리를 놓지 않으려 했다
왕비가 된 뒤
궁에는 임금의 여자가 많았다. 왕비의 자리는 임금의 마음 하나에 매여 있었다. 윤씨는 왕비의 자리를 지키려 했고, 후궁들과 자주 부딪쳤다.
1477년, 윤씨의 처소에서 비상이 나왔다. 후궁들을 해치려 했다는 혐의가 붙었다. 한때 윤씨를 지지했던 시어머니 인수대비가 등을 돌렸다.
윤씨는 고개를 숙이고 조용한 왕비가 되기를 거부했다. 가진 것 없이 자라 처음으로 손에 쥔 자리였다. 자리를 놓으면 돌아갈 곳은 다시 가난한 사가뿐이었다.
1479년 6월, 성종이 윤씨를 폐위했다. 여러 신하가 어린 원자의 어머니라는 이유로 반대했지만, 가장 앞장서 밀어붙인 사람은 임금 자신이었다. 윤씨는 왕비의 옷을 벗고 자라난 사가로 쫓겨났다.
성종은 진실을 묻으려 했다
사약을 내린 까닭
폐위만으로는 끝나지 않았다. 폐비를 살려 두기만 하면, 훗날 세자가 임금이 됐을 때 어머니의 일을 들고 일어설 수 있었다. 1482년 8월, 성종이 좌승지 이세좌를 시켜 윤씨에게 사약을 내렸다.
신하들은 다시 말렸다. 세자의 친어머니를 죽이면 뒷날이 두렵다는 이유였다. 성종은 듣지 않았다.
성종은 한 가지를 더 했다. 윤씨의 일을 자기가 죽은 뒤 백 년 동안 입에 올리지 말라고 못 박았다. 그리고 세자 융에게는, 새 왕비 정현왕후를 친어머니로 믿게 하며 키웠다.
어머니가 사약을 받고 죽었다는 사실을, 다음 임금이 될 아들 한 사람만 끝내 모르게 한 셈이었다.
묻은 진실은 십 년 만에 돌아왔다
세자가 임금이 되고 나서
1494년, 세자 융이 임금이 됐다. 연산군이다. 즉위한 뒤 연산군은 친어머니가 정현왕후가 아니며, 폐비 윤씨가 사약을 받고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1504년, 연산군은 어머니의 폐위와 죽음에 손댄 사람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갑자사화다. 백 년을 막으려 한 일이, 성종이 죽은 지 십 년 만에 가장 끔찍한 방식으로 돌아왔다.
가난한 집 딸로 태어나 왕비에 올랐다가 사약을 받은 윤씨는, 죽어서도 조용히 잊히지 못했다. 윤씨가 세상에 남긴 단 하나가, 다음 임금이 된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연산군이 일으킨 갑자사화, 알고 보면 아버지 성종이 백 년을 덮으려 한 어머니의 사약에서 비롯됐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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