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Calypso · 사라진 풍습· 공유받은 글

이중섭은 그림은 내주고 밥은 밀어냈다

1956년 봄, 명동. 다방에선 찻값 대신 그림을 두고 가기도 했다. 그러나 이중섭은 여름이 오자 밥만은 받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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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 1

이중섭에게 그림은 화폐였다

그림은 내주고, 밥은 밀어낸 사람

1956년 봄, 명동. 이중섭은 다방에 앉아 베니어 합판이나 담뱃갑 은박지에 그림을 그렸다. 재료 살 돈이 없어, 종이 대신 손에 닿는 것에 그렸다.

1950년대 명동 다방에서는 가난한 화가가 찻값 대신 그림 한 장을 두고 일어서기도 했다. 이중섭에게 그림은 돈이 없을 때 꺼내는 유일한 화폐였다.

찻값
그림을 두고 가기도
밥 한 그릇
끝내 받지 않았다

그림이 거의 유일한 화폐였던 이중섭이, 여름이 오자 밥만은 받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CH. 2

이중섭은 식구를 일본으로 보냈다

식구를 배에 태워 보냈다

1952년 6월, 전쟁 통의 부산. 이중섭은 끼니를 잇지 못해 일본인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와 어린 두 아들을 일본으로 가는 배에 태웠다. 아내의 한국 이름은 이남덕이었다.

이중섭은 부산에 혼자 남았다. 식구에게 갈 뱃삯을 그림을 팔아 마련할 작정이었다. 식구를 떠나보낸 뒤로, 그림은 그리움이자 일본으로 건너갈 유일한 길이 됐다.

재료가 없었다. 이중섭은 길에 버려진 담뱃갑을 주워 은박지를 펴고, 못으로 선을 새긴 뒤 먹을 문질러 그림을 만들었다. 사람들은 은지화라 불렀다.

담뱃갑에 새긴 은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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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미국대사관 문정관 아서 맥타가트가 사 가, 뒷날 뉴욕 현대미술관에 들어갔다

담뱃갑에 그림을 새기면서도 이중섭이 판 그림값은 늘 일본으로 부칠 돈이었다. 그림값을 한 번에 마련할 자리가, 1955년 명동에 마련됐다.

CH. 3

이중섭은 전시에 모든 걸 걸었다

그림을 팔아 가족에게 가려 했다

1955년, 명동 미도파백화점 화랑. 이중섭은 첫 개인전을 열었다. 그림 마흔다섯 점을 걸고, 팔린 돈으로 일본의 식구에게 건너갈 작정이었다.

절반쯤이 팔렸다. 그러나 사 간 사람들 상당수가 값을 외상으로 미뤘고, 약속한 돈은 끝내 들어오지 않았다. 그림은 벽에서 내려갔지만, 일본행 뱃삯은 모이지 않았다.

전시에 내건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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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반이 팔렸으나 값은 외상으로 남았다

전시가 끝난 1955년 여름, 이중섭은 그림으로도 식구에게 갈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친구 구상이 이중섭을 대구의 병원에 데려갔다. 영양실조와 거식이 시작된 무렵이었다.

병원을 나와도 차도가 없었다. 곡기를 끊는 버릇이 깊어졌다. 친구들은 1956년 여름, 이중섭을 서울적십자병원으로 옮겼다.

CH. 4

이중섭은 밥상을 밀어냈다

밥을 받지 않은 까닭

1956년 여름, 서울적십자병원. 이중섭은 차려진 밥상을 자주 밀어냈다. 의사도 친구도 한 술 뜨기를 권했지만, 이중섭은 수저를 들지 않았다.

곁을 지킨 친구 구상에게, 이중섭은 밥을 받지 않는 까닭을 털어놓았다.

나는 그림을 그린답시고 세상을 속였다. 꽁밥을 얻어먹고 다니며 무엇이 될 것처럼 사기를 쳤다.
이중섭이 친구 구상에게 남긴 말

그림이 화폐였던 이중섭이, 정작 밥 한 그릇 앞에서는 값을 치를 자격이 없다고 여긴 것이다. 일본의 식구에게 끝내 닿지 못한 그림은, 이중섭에게 더는 화폐가 아니라 빚이었다.

곡기를 끊어 몸이 쇠약해지는 사이, 간염이 겹쳤다. 1956년 9월, 이중섭은 마흔 살이었다.

CH. 5

이중섭은 무연고자로 분류됐다

사흘 동안 아무도 몰랐다

1956년 9월 6일 밤, 서울적십자병원. 이중섭은 간염으로 숨졌다. 곡기를 끊어 쇠약해진 몸이었다. 병원은 이중섭을 연고 없는 무연고자로 분류했다.

사흘이 지난 9월 9일에야 평양 종로보통학교 선배인 소설가 김이석이 빈소를 찾아, 이중섭의 죽음이 세상에 알려졌다.

그림은 내주면서도 끝내 밥 한 그릇은 받지 않은 이중섭이 두고 간 담뱃갑 은지화 석 점은, 지금 뉴욕 현대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 끝 —
카톡 한 줄

이중섭이 끝에 밥을 거부한 건, 제 그림이 세상을 속인 사기였다고 스스로 믿었기 때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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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