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Calypso · 세계사 한국인 모름· 공유받은 글

군인들이 있었다, 8천 명이 죽었다

1995년 7월, 보스니아 스레브레니차. 유엔이 '안전지대'라 부른 마을을, 네덜란드 군인 400명이 지키고 있었다.

↓ 스크롤
CH. 1

유엔이 한 마을을 '안전'이라 불렀다

1995년 7월, 스레브레니차

유엔이 '안전지대'라 이름 붙인 마을이었다. 총을 든 평화유지군이 그 안에 서 있었다.

1995년 7월 11일, 세르비아계 군대가 마을로 걸어 들어왔다. 평화유지군은 총을 쏘지 않았다.

안전지대에서 끌려간 사람
8,000+
남자와 소년

평화유지군은 스레브레니차를 떠나지 않았다. 8천 명이 넘는 남자와 소년이 사라지는 동안에도.

CH. 2

400명이 수만 명을 지켜야 했다

'안전지대'라는 약속

1993년 4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스레브레니차를 '안전지대'로 선포했다. 결의 819호였다. 세르비아계 군대가 마을을 이미 포위한 뒤였다.

1994년 3월, 네덜란드 대대가 방어 임무를 넘겨받았다. 600명이 왔고, 무장은 가벼웠다.

휴가를 나간 병사들은 돌아오지 못했다. 마을을 에워싼 세르비아계 군대가 보급로를 끊고 병력 교대를 막았기 때문이다. 1995년 여름, 스레브레니차에 남은 네덜란드 병력은 400명 남짓이었다.

지켜야 할 사람
수만 명
지키는 군인
400여 명

'안전'은 유엔이 내건 약속이었다. 네덜란드 군인들은 약속 뒤에 나토 전투기가 있다고 믿었다.

믿음은 종이 위에 적혀 있었다. 마을을 포위한 세르비아계 군대는 종이를 읽지 않았다.

CH. 3

카레만스가 전투기를 불렀다

지휘관의 요청

1995년 7월 6일, 세르비아계 군대가 안전지대를 향해 진격을 시작했다. 마을 둘레의 관측소가 하나씩 무너졌다.

7월 8일, 네덜란드 병사 라비브 반 렌센이 스레브레니차에서 목숨을 잃었다. 세르비아계와의 교전에서가 아니라, 관측소에서 물러나던 혼란 속에서였다. 다치바트가 잃은 유일한 병사였다.

대대장 톰 카레만스는 400명으로 세르비아계 군대에 맞설 수 없다고 판단했다. 카레만스는 하늘을 택했다. 나토 전투기의 공습을 거듭 요청했다.

너무 늦게 왔고, 그마저도 너무 적었다.
톰 카레만스, 훗날 국제법정 증언
CH. 4

전투기가 왔다, 그리고 멈췄다

50명이라는 이유

1995년 7월 11일 오후, 나토 전투기가 마침내 스레브레니차 상공에 나타났다. 세르비아계 탱크 두 대를 때렸다.

하지만 공습은 곧 중단됐다. 세르비아계 군대가 네덜란드 병사 약 50명을 인질로 붙잡고, 병사들을 처형하고 피란민이 몰린 곳을 포격하겠다고 통보했기 때문이다.

공습을 멈추게 한 숫자
50
인질로 잡힌 네덜란드 병사

7월 11일, 마을이 함락됐다. 라트코 믈라디치 장군이 스레브레니차로 걸어 들어왔다.

믈라디치는 카레만스를 불러 술잔을 건넸다. 카메라 앞에서 믈라디치와 카레만스가 잔을 부딪쳤다. 네덜란드 텔레비전으로 방영돼 훗날 '수치의 건배'라 불린 장면이다.

포토차리 기지 앞으로 2만 명이 넘는 사람이 몰려들었다. 세르비아계 군대는 여자와 아이를 버스에 태웠다. 남자들은 '나중에 보내겠다'며 따로 세웠다.

버스는 떠났다. 따로 세워진 남자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CH. 5

네덜란드가 대가를 치렀다

'안전지대'가 남긴 것

2002년 4월, 네덜란드 정부가 총사퇴했다. 스레브레니차를 조사한 보고서가 나온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서였다.

2019년 7월, 네덜란드 대법원이 국가의 책임을 인정했다. 기지에서 돌려보낸 남자 약 350명에 대해, 10퍼센트였다.

네덜란드 국가가 인정한 책임
10%
기지에서 돌려보낸 남자 350명에 대해

'안전지대'는 유엔이 만든 말이었다. 스레브레니차에서 '안전'은 총을 뜻하지 않았다.

— 끝 —
카톡 한 줄

유엔이 '안전지대'라 부른 곳에서 8천 명이 죽은 건, 그 말에 총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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