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빵 값은 재단사의 차비였다
1970년 청계천 평화시장. 한 재단사가 차비를 털어 어린 여공에게 풀빵을 사주고, 밤길 12km를 걸어 집에 갔다.
저녁마다 차비가 사라졌다
1970년, 청계천 평화시장
저녁마다 한 재단사가 자기 차비를 털어 어린 여공들에게 풀빵을 사주었다. 점심을 굶은 아이들이었다.
재단사는 시다보다, 미싱사보다 나은 자리였다. 그런데 저녁마다 차비가 사라졌다. 왜 자기 몫을 다 내주었을까.
천장은 1.5미터였다
다락방, 천장 1.5미터
1970년대, 옷을 짓는 일은 한국 수출의 맨 앞줄에 있었다. 청계천 평화시장은 봉제 도매의 심장이었다.
평화시장 공장은 천장이 높았다. 공장주들은 높이를 반으로 갈라 판자를 깔았다. 위층 다락방은 천장이 1.5미터, 사람이 허리를 펼 수 없었다.
다락방을 채운 건 대부분 어린 여공이었다. 시다는 국민학교를 갓 마친 열세 살부터 있었고, 평균 열다섯이었다. 아침 여덟 시 반부터 밤 열 시 반까지 하루 열네 시간. 성수기엔 밤을 새웠고, 잠이 오지 않게 하는 약을 받았다.
평화시장 다락방에서 일한 사람 중에 전태일이 있었다. 시다로 들어와 미싱사를 거쳐 재단사가 되었다. 재단사가 되자 월급이 조금 올랐다. 옆 다락방 열세 살 아이들을 굳이 안 봐도 되는 자리였다. 전태일은 나은 자리에 올라섰지만, 아이들이 더 눈에 들어왔다.
전태일이 법전을 펼쳤다
1968년, 아버지의 말
1968년, 전태일이 아버지에게서 한 가지를 들었다. 노동자를 지키는 법이 따로 있다는 말이었다. 근로기준법이었다.
전태일이 법전을 구해 펼쳤다. 하루 여덟 시간, 정기 휴일, 건강검진. 평화시장 다락방에서 벌어지던 모든 것이, 법으로는 이미 불법이었다.
법전은 어려운 한자와 법률 용어로 채워져 있었다. 국민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한 재단사가 혼자 읽기엔 벅찼다.
“대학생 친구가 하나 있었으면 소원이 없겠다.”
전태일은 읽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1969년 6월, 평화시장에서 처음으로 노동자 모임을 만들었다. 이름은 바보회. 법이 있는 줄도 모르고 당해 온 처지를, 스스로 바보라 불렀다.
전태일이 스스로 불을 붙였다
1970년 11월 13일
바보회가 알려지자 전태일은 평화시장에서 쫓겨났다. 근로 조건을 신고해도 감독관은 눈을 감았다. 설문지를 돌리고 진정서를 써도, 다락방은 그대로였다.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과 삼동회 회원들이 평화시장 앞에 모였다. 지키지도 않는 근로기준법이라면 태워버리겠다며, 법전 화형식을 열려 했다. 경찰이 막아섰다.
막아선 경찰 앞에서, 전태일이 자기 몸에 휘발유를 부었다. 그리고 불을 붙였다. 손에는 근로기준법 법전이 들려 있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저녁마다 차비가 사라지던 이유가 여기서 드러났다. 옆자리 열세 살 아이들을 동생처럼 본 재단사는, 마지막에 자기 자신까지 내주었다. 스물두 살이었다.
이소선이 약속을 지켰다
남은 사람
전태일은 1970년 11월 13일 밤, 명동성모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마지막 말은 어머니 이소선을 향했다.
“어머니, 내가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대신 이뤄 주세요.”
이소선은 아들의 말을 안고 평화시장으로 돌아갔다.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청계천 노동자들 곁에 있었다.
천장 1.5미터 다락방도, 시다라는 말도 이제 평화시장에 없다. 저녁마다 차비를 털어 풀빵을 사주던 재단사는, 스물두 살에서 멈췄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말, 알고 보면 어린 여공한테 풀빵 사주던 스물두 살 재단사가 남긴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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