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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ypso · 과학·예술· 공유받은 글

1분 뒤 도스토옙스키는 죽을 예정이었다

1849년 12월 22일, 페테르부르크. 흰 셔츠를 입은 스물여덟 살 남자에게 1분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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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 1

도스토옙스키에게 1분이 남았다

1849년 12월 22일, 페테르부르크

세묘놉스키 연병장에서 스물여덟 살 작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가 사형 선고문을 들었다. 죄수들은 십자가에 입을 맞췄고, 머리 위에서는 칼이 부러졌다. 그리고 죄수들에게 흰 셔츠가 입혀졌다. 흰 셔츠는 수의였다.

죄수들은 세 명씩 호명됐다. 여섯 번째에 서 있던 도스토옙스키는 두 번째 조였다. 첫 세 사람이 기둥에 묶였고, 병사들이 총을 들었다.

도스토옙스키에게 남은 시간
1
"내가 살아 있을 시간은 1분도 채 남지 않았다" — 1849년 12월 22일, 형 미하일에게 보낸 편지

사람은 마지막 1분을 어디에 쓰는가. 1849년 12월 22일 아침, 도스토옙스키 앞에 남은 질문은 하나였다.

CH. 2

니콜라이 1세가 1848년 유럽을 지켜봤다

왜 1849년이었나

1848년 2월, 파리에서 왕 루이 필리프가 쫓겨났다. 혁명은 빈과 베를린으로 번졌다. 니콜라이 1세는 국경 너머에서 왕좌들이 흔들리는 광경을 지켜봤다.

1848년 4월 2일, 니콜라이 1세가 비밀 위원회 하나를 세웠다. 위원장은 드미트리 부투를린이었고, 위원회는 검열관들을 감독했다. 위원회가 살핀 것은 광장의 연설이 아니라 인쇄되는 문장이었다.

페테르부르크에서는 금요일 저녁마다 미하일 페트라솁스키의 집에 사람들이 모였다. 모인 사람들은 프랑스 사람 샤를 푸리에의 공상적 사회주의를 읽었다. 농노제와 검열이 금요일 저녁의 주제였다.

페트라솁스키의 금요일 자리에 작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가 앉아 있었다. 1846년 첫 소설 《가난한 사람들》로 데뷔해 페테르부르크 문단에 이름을 알린 작가였다.

《가난한 사람들》을 극찬해 도스토옙스키라는 이름을 문단에 박아 넣은 사람은 비평가 비사리온 벨린스키였다. 1848년 벨린스키가 결핵으로 죽었다. 죽기 한 해 전 여름, 요양지 잘츠브룬에서 벨린스키는 소설가 고골에게 편지 한 통을 썼다. 고골이 교회와 황제에 대한 복종을 설교한다고 벨린스키는 규탄했다.

러시아에 지금 가장 절실한 문제는 농노제의 폐지, 태형의 폐지, 그리고 이미 있는 법이나마 최대한 엄격히 지키는 것이다.
1847년, 비사리온 벨린스키가 고골에게 보낸 편지

벨린스키의 편지는 정교회와 황제를 정면으로 겨눴다. 러시아에서 인쇄될 수 없었고, 손으로 베낀 사본으로 돌았다.

CH. 3

도스토옙스키가 금지된 편지를 읽었다

1849년 봄

1849년 3월 11일, 안토넬리라는 요원이 페트라솁스키의 금요일 모임에 처음 나타났다. 내무부 특임관 이반 리프란디의 제안으로 대학을 그만두고 외무부에 들어가 있던 사람이었다.

1849년 4월, 도스토옙스키가 모임에서 죽은 벨린스키의 편지를 소리내어 읽었다. 인쇄될 수 없어 손으로 베낀 사본이었다. 1849년 봄 내내 안토넬리는 금요일 모임에 매주 나갔고, 보고서도 매주 올라갔다.

1849년 4월 23일, 도스토옙스키가 체포됐다.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의 독방에서 여덟 달을 보냈다.

1849년 11월 16일, 군사법정이 판결을 읽었다. 법정은 도스토옙스키가 벨린스키의 편지를 모임에서 소리내어 읽고, 베껴 쓰라며 니콜라이 몸벨리에게 건넨 사실을 인정했다. 니콜라이 그리고리예프 중위는 〈병사의 대화〉라는 글을 썼다. 법정은 〈병사의 대화〉가 낭독되던 자리에 도스토옙스키가 앉아 있었다는 사실도 인정했다.

판결문이 못 박은 죄목은 도스토옙스키가 한 일이 아니었다. 금지된 편지가 돌아다니는 것을 알고도, 그리고리예프의 글이 읽히는 자리에 앉아 있고도, 도스토옙스키는 관청에 알리지 않았다. 죄목은 고발하지 않은 죄 하나였고, 벨린스키의 편지와 그리고리예프의 글 두 문서가 죄목 하나에 함께 걸렸다.

군사법정이 인정한 죄
알고도 고발하지 않았다
선고된 형
총살

선고 뒤 다섯 주가 지나도록 형은 집행되지 않았다. 1849년 12월 22일 아침, 죄수들이 마차에 실려 세묘놉스키 연병장으로 나갔다.

CH. 4

페트라솁스키가 기둥에 먼저 묶였다

1849년 12월 22일 아침, 세묘놉스키 연병장

기둥에 먼저 묶인 사람은 미하일 페트라솁스키, 니콜라이 몸벨리, 니콜라이 그리고리예프 세 사람이었다. 세 사람의 눈이 가려졌다. 도스토옙스키는 두 번째 조에서 순서를 기다렸다.

1분이 지나기 전에 북이 울렸다. 후퇴 신호였다. 병사들이 총을 내렸다.

마침내 후퇴 신호가 울렸고, 기둥에 묶였던 사람들이 되돌아왔다. 그리고 황제 폐하께서 우리에게 목숨을 내려주셨다는 발표가 있었다.
1849년 12월 22일, 도스토옙스키가 형 미하일에게 보낸 편지

1849년 12월 22일 아침의 총살은 예정에 없었다. 니콜라이 1세는 죄수들이 연병장에 서기 전에 이미 감형을 정해 두었다. 황제는 조건을 하나 달았다.

니콜라이 1세가 미리 정한 것
감형
니콜라이 1세가 감형에 단 조건
처형에 앞선 의식을 모두 마친 뒤에 알릴 것

니콜라이 1세의 지시를 도스토옙스키는 알지 못했다. 도스토옙스키가 센 1분은, 아무도 죽지 않기로 이미 정해진 1분이었다. 연병장에서 벌어진 일 자체가 형벌의 일부였다.

CH. 5

도스토옙스키는 1849년의 1분을 다시 썼다

1849년 12월 22일 저녁

도스토옙스키는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로 돌아와 형 미하일에게 편지를 썼다. 오늘 사십오 분 동안 죽음의 생각과 함께 살았고 지금 다시 살아 있다고, 도스토옙스키는 적었다.

인생은 선물이다. 인생은 행복이다. 매 순간이 행복의 영원일 수 있었다.
1849년 12월 22일, 도스토옙스키가 형 미하일에게 보낸 편지

며칠 뒤 도스토옙스키는 쇠사슬을 차고 시베리아로 떠났다. 옴스크의 감옥에서 4년을 살았다.

세묘놉스키 연병장에서 기둥에 먼저 묶였던 세 사람 가운데 한 명이 니콜라이 그리고리예프 중위였다. 그리고리예프는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의 독방에서 이미 정신에 이상 조짐을 보이고 있었고, 연병장에서 완전히 정신을 놓았다. 병은 유형지에서 깊어졌고, 1857년 그리고리예프는 정신 이상 상태로 가족에게 넘겨졌다.

세묘놉스키 연병장의 아침에서 열아홉 해가 지난 1868년, 유럽에 머물던 도스토옙스키가 소설 《백치》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소설 안에서 미시킨 공작이 사형을 앞둔 남자의 이야기를 꺼낸다. 스물일곱 살의 건강한 남자에게 남은 시간은 5분이다.

《백치》 속 남자가 나눈 5분
2 + 2 + 1
동료와 작별에 2분, 마지막으로 자기를 생각하는 데 2분, 남은 1분은 주위를 둘러보는 데 쓴다

1849년 12월 22일 세묘놉스키 연병장의 1분 동안, 도스토옙스키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열아홉 해 뒤 도스토옙스키는 1849년의 1분을 5분으로 늘려, 스물일곱 살 남자의 시간표로 다시 적었다. 도스토옙스키 본인은 연병장에 섰던 아침에 스물여덟이었다.

— 끝 —
카톡 한 줄

도스토옙스키가 죽음을 그렇게 잘 쓴 건, 스물여덟에 섰던 사형장이 황제의 각본이었기 때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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