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투성이 김일이 이노키를 껴안았다
1975년 3월 27일 장충체육관, 김일의 왼쪽 귀에서 피가 흘렀다. 13분 38초, 승자는 없었다.
심판이 스물을 셌고 승자는 없었다
1975년 3월 27일, 장충체육관
서울 장충체육관에 8천 명이 들어찼다. 링 위에서 김일의 왼쪽 귀가 베였다. 피투성이가 된 김일은 화가 난 채로 머리를 내리꽂았다.
도전자는 안토니오 이노키였다. 김일의 인터내셔널 헤비급 벨트가 걸려 있었다.
김일과 안토니오 이노키는 서로에게 다리 4자 굳히기를 건 채 링 밖으로 함께 떨어졌다. 심판은 스물까지 셌다. 타이틀은 김일에게 남았고, 이긴 사람은 없었다.
김일과 안토니오 이노키가 링에서 마주 선 것은 1975년이 처음이 아니었다.
고흥의 김태식이 역도산을 동경했다
1955년, 일본
1955년 일본, 사람들이 거리에 놓인 텔레비전 앞에 몰려 프로레슬링을 봤다. 링 위에서 미국 선수들을 넘어뜨리는 사람의 이름은 역도산이었다. 전쟁에 진 나라에서 역도산은 이기는 사람이었다.
역도산의 본명은 김신락이었다. 함경남도 홍원에서 태어났다. 스모를 그만둔 뒤로 역도산은 조선 사람이라는 사실을 주위에 감추고 살았다.
전라남도 고흥에서 1929년에 태어난 김일의 본명은 김태식이었다. 김태식은 역도산을 동경했다. 조선에서 건너간 사람이 일본 링의 꼭대기에 서 있었다.
1950년대 후반, 김태식은 역도산을 만나러 가기로 했다. 김태식이 올라탄 것은 어선이었고, 어선이 향한 곳은 일본이었다.
역도산이 김일의 한국 이름을 금했다
1950년대 말, 일본
어선을 타고 일본에 닿은 김태식은 출입국 관리법을 어긴 밀입국자였다. 김태식은 붙잡혔고, 갇혔다. 갇힌 김태식이 한 일은 편지를 쓰는 것이었다. 역도산에게 제자로 받아 달라고 썼다.
역도산이 신원 인수인으로 나섰다. 일본프로레슬링 커미셔너였던 정치인 오노 반보쿠까지 움직였고, 김태식은 풀려나 일본프로레슬링에 들어갔다.
역도산은 김일에게 오키 긴타로라는 링네임을 주었고, 한국 이름을 쓰는 것은 엄금했다. 조선 출신을 감추고 사는 스승이, 조선에서 밀항해 온 제자에게 건 금지였다.
1959년 11월, 오키 긴타로라는 이름으로 김일이 데뷔했다. 무기는 머리였다. 일본에서 김일의 박치기를 원폭 박치기라고 불렀다.
1960년 9월 30일, 도쿄 다이토구의 체육관에서 한 신인이 프로 첫 경기를 치렀다. 링 반대편에 선 사람이 김일이었고, 신인은 7분 6초 만에 졌다. 신인은 자기 본명을 그대로 쓰고 링에 올랐다. 훗날 안토니오 이노키로 불리게 되는 신인이었고,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역도산이 직접 뽑아 데려온 사람이었다.
역도산이 아카사카에서 칼에 찔렸다
1963년 12월, 도쿄
1963년 12월 8일 밤, 도쿄 아카사카의 나이트클럽에서 역도산이 칼에 찔렸다. 일주일 뒤 역도산이 죽었다. 마음을 기대던 사람을 잃은 김일은 일본에 있을 자리가 없어졌고, 한국으로 일단 돌아갔다.
1964년 9월, 김일은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일본 링으로 돌아왔다. 1960년 데뷔전에서 김일에게 진 뒤로, 안토니오 이노키는 김일을 이기지 못하고 있었다.
1974년 10월 10일, 도쿄 구라마에 국기관. 안토니오 이노키는 NWF 세계 헤비급 챔피언이었고, 여섯 번째 방어전 상대로 김일을 불렀다. 13분 13초, 이노키의 백드롭이 김일을 눕혔다. 데뷔전 이후 이노키가 김일에게서 거둔 단 한 번의 승리였다.
1974년 10월 도쿄에서 김일은 이노키의 벨트를 얻지 못했다. 이듬해 3월, 안토니오 이노키가 김일의 벨트를 향해 서울로 왔다. 1975년 3월 27일, 장충체육관에 8천 명이 들어찼다.
이노키의 주먹이 김일의 왼쪽 귀로 몰렸다. 김일의 왼쪽 귀가 베여 피투성이가 되었다. 화가 난 김일은 원폭 박치기를 내리꽂았다. 안토니오 이노키는 두 발, 세 발을 견뎠고 네 발째에 쓰러졌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다리 4자 굳히기를 걸었고, 걸린 채로 링 밖으로 함께 떨어졌다. 8천 명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심판은 스물까지 셌다.
링 위에서 김일과 안토니오 이노키는 서로의 분투를 기리며 껴안았다. 조명이 두 사람을 비췄다. 1960년 9월 30일 도쿄에서 안토니오 이노키의 첫 상대였던 사람이 김일이었다.
안토니오 이노키가 인터내셔널 헤비급 왕좌에 도전한 것은 1975년 3월 27일 장충체육관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김일은 휠체어에서 일어나 링에 올랐다
오키 긴타로와 김일
안토니오 이노키가 도전한 인터내셔널 헤비급 벨트를 김일이 얻은 것은 1972년 12월이었다. 1975년 장충체육관의 도전은 김일이 1981년 3월까지 치른 스물아홉 번의 방어전 가운데 하나였다.
박치기는 김일의 몸에도 쌓였다. 1982년, 김일의 목에 지병이 도졌다. 마지막 경기도 1982년이었다. 1987년부터 김일은 경기 후유증으로 여러 병을 앓았다.
1995년 4월 2일, 도쿄돔에서 김일의 은퇴식이 열렸다. 김일은 휠체어에 앉은 채 링으로 이어진 통로를 들어왔다. 링에 오를 때 김일은 휠체어에서 일어섰다. 링포스트를 몇 차례 두드린 뒤 김일은 링을 떠났다.
2006년 10월 26일, 김일은 서울 노원구의 병원에서 일흔일곱에 세상을 떠났다.
일본 링에서 김일에게 한국 이름은 허락되지 않았다. 1975년 3월 27일 장충체육관, 링 위에서 안토니오 이노키를 껴안은 사람은 오키 긴타로가 아니라 김일이었다.
김일에게 한국 이름을 금한 스승 역도산의 본명은 함경남도 홍원의 김신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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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大木金太郎 — 일본어 위키백과 (1929년 2월 24일 전라남도 고흥군 금산면 출생 · 본명 金泰稙 · 「1958年、同郷の英雄である力道山に憧れて漁船で日本に密入国」 — ch2 의 '역도산을 동경했다'·'어선' 직접 근거 · 「1959年に入管法違反で逮捕される」 · 「力道山が身元引受人となり、日本プロレスコミッショナーの大野伴睦代議士を動かしたことで釈放」 — ch3 의 신원 인수인·오노 반보쿠 직접 근거 · 「同年11月に『大木金太郎』のリングネームでジョー樋口相手にデビュー」(1959년 11월 데뷔) · 「原爆頭突き」 · 「力道山を心の拠り所にしていた大木は居場所がなくなり、韓国へ一旦帰国した」 · 「1964年9月より再びアメリカへ渡り」 · 「1972年12月1日にボボ・ブラジルとの『頭突き世界一決定戦』がインターナショナル・ヘビー級王座の決定戦となり、第一戦は敗れるも、3日後の再戦で勝利してインター王座を獲得」 — ch5 의 '1972년 12월' 기산점 근거 · 「1974年10月10日、蔵前国技館において猪木とのシングル戦を行う」 · 「1982年の阿修羅・原戦を最後に首の持病が悪化し、レスラーとしては事実上のリタイア状態となった」 · 1995-04-02 東京ドーム 引退セレモニー 「車椅子姿で花道を入場してきたが、リング・インの際は気丈に立ち上がり、ルー・テーズと共にリング内に進む」 — ch5 subtitle·은퇴식 문장·휠체어 블록의 직접 근거 · 「2006年10月26日、ソウル特別市蘆原区の乙支病院において…死去」 「77歳没」)
- 力道山 — 일본어 위키백과 (본명 金信洛 — share_line 근거 · 「日本統治下朝鮮の咸鏡南道洪原郡新豊里」 — share_line 의 '함경남도 홍원' 근거 · 「相撲からの廃業後は自らが朝鮮人であることについては周囲に隠して生きており」 · 「門下生にし、大木金太郎のリング名を与えたが、大木には韓国名を用いることを厳禁した」 — ch3.blocks[4]·ch5 마지막 블록 근거 · 大野伴睦의 정치력 · 1963-12-08 자상, 12-15 사망 · 1955년 街頭テレビ · 생년월일과 향년에 「諸説あり」 표기 — 본문이 향년을 서술하지 않는 이유)
- アントニオ猪木 — 일본어 위키백과 (1960-04-11 상파울루에서 역도산에게 직접 스카우트 · 1960-09-30 台東区体育館에서 「本名の猪木完至として」 데뷔, 상대 大木金太郎, 7分6秒 패 — ch3 마지막 블록 '자기 본명을 그대로 쓰고 링에 올랐다' 근거 · 1974-10-10 「NWF世界ヘビー級選手権試合」 13分13秒 백드롭 승, 「デビュー戦の敗退から初の、そして唯一の勝利」 · 1975-03-27 서울 인터 왕좌 도전, 「両者リングアウトで大木が防衛」 — 이노키전이 29회 방어에 포함되는 근거)
- 街頭テレビ — 일본어 위키백과 (가두 텔레비전은 日本テレビ 사장 正力松太郎 가 설치를 추진 · 「特に人気番組のプロレス中継・ボクシング中継・大相撲中継・プロ野球中継には観衆が殺到した」 · 이미지 캡션 「国際プロレスリング大会での力道山戦の放送に群がる市民(1955年)」). ch2 heading '1955년, 일본' 과 ch2.blocks[1] 의 직접 근거 — 이 문서 하나로 1955년·가두 텔레비전·프로레슬링 중계·일본이 모두 확정된다
- 東スポWEB — 1975年3月27日 猪木VS大木金太郎「血染めの激闘」 (奨忠体育館 「超満員8000人の観衆」 · 「大木は左耳を切って血まみれになりながらも」 · 「猪木はパンチで左耳に集中攻撃」 · 「怒った大木は火が噴くような原爆頭突き。猪木は耐える。2発、3発…しかし4発目でついにダウン」 · 「両雄は足4の字をかけ合ったまま場外に転落した。観客は総立ち。ついに20カウントが数えられた」 — ch1.blocks[4]·ch4.blocks[6] 의 '서로에게 다리 4자 굳히기' 상호성 근거 · 「リング上では、猪木と大木が健闘をたたえ合って抱き合う姿がスポットで照らされる」 — ch4 스파이크 블록의 직접 근거)
- 東スポWEB — 猪木が大木金太郎と壮絶4の字相討ち ソウル決戦で最初で最後のインター王座挑戦 (「72年12月4日に大木金太郎(キム・イル)がボボ・ブラジルを破り、第9代王者となる」 — ch5.blocks[1] 기산점 근거 · 「大木は81年3月まで29度の防衛を重ねたが、NWAからの勧告で王座を返上」 — number_card '29회' 근거이자 29회가 1972~1981 누적임을 확정 · 「13分38秒、20カウントで両者リングアウトの引き分け」 — push.body 와 ch1 number_card 의 '13분 38초' 근거 · 「75年3月27日、ソウル奨忠体育館で猪木にとって最初で最後のインター王座挑戦が実現した」 · 「館内は8000人の超満員」)
- 東スポWEB — 大木金太郎VSボボ・ブラジル 日米頭突き一代対決 (「72年12月4日インターナショナル王座」 — ch5.blocks[1] 기산점 '1972년 12월' 의 독립 2차 확인)
- インターナショナル・ヘビー級王座 — 일본어 위키백과 (1972년 12월 大木 vs ボボ・ブラジル 왕자결정전 · 「これは猪木唯一のインター戦となった」 — ch4 마지막 블록 '처음이자 마지막' 의 독립 확인 · 「全日本プロレスは1981年4月13日、NWA本部からの勧告という形で大木に王座を返上させ」). 본문의 '1981년 3월까지 스물아홉 번의 방어전' 과 충돌하지 않음을 확인 — 마지막 방어전(3월)과 왕좌 반납(4월)은 별개 시점이며 본문은 반납일을 주장하지 않는다
- J:COM 니노미야 세이준 프로레슬링 칼럼 — 猪木VS大木金太郎 (1974-10-10 구라마에 국기관 · 「猪木さんは6度目の防衛戦の相手に日本プロレス時代の先輩である大木さんを迎えます」 — ch4 '여섯 번째 방어전' 근거 · 「それからも猪木さんが大木さんに勝つことはありませんでした」)
- 백세시대 — 필살기 박치기로 통쾌한 승리감 안긴 스포츠 영웅 김일 (밀항 · 수감 중 역도산에게 제자로 받아 달라는 편지 — ch3.blocks[1] 의 '편지' 근거이며 빈도 주장은 본문에서 제거함 · 「1987년부터 경기 후유증으로 각종 질병에 시달리며 투병생활」 · 도쿄돔 은퇴식 「휠체어를 타고 입장했지만 마지막으로 링포스트를 몇 차례 두드린 뒤 링을 떠나며」 — ch5.blocks[4] 의 '은퇴식'·'링포스트' 근거. '입장' 과 '링인' 을 가르는 역접 서술로, 1차 출처의 「リング・インの際は気丈に立ち上がり」 와 일치)
- 김일 (프로레슬링 선수) — 한국어 위키백과 (본명 김태식 · 1929-02-24 전라남도 고흥군 금산면 출생 · 2006-10-26 서울 을지병원 사망). ch2 '김일의 본명은 김태식' 근거
- 데일리신초 — 力道山 자상 현장 ニューラテンクォーター 원 사장 증언 (아카사카 호텔 뉴 재팬 지하 나이트클럽)
- 국가기록원 「기록으로 만나는 대한민국」 프로레슬링 (1960~70년대 프로레슬링의 국민적 인기 · 김일의 박치기 · 역도산 문하)
- 서울신문 — 안토니오 이노키 별세 (데뷔전 상대가 김일이었고 이노키가 패함 · 이후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김일과 명승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