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Calypso · 인물 비화· 공유받은 글

김옥균은 자객을 두 번 알아보고 배를 탔다

1894년 3월 28일 상하이, 여관 2층. 김옥균과 같은 배로 온 조선인이 세 발을 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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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 1

상하이 여관 2층에서 세 발이 울렸다

1894년 3월 28일, 상하이

1894년 3월 28일 오후, 상하이 미국 조계 안의 일본 여관 동화양행. 2층 객실에서 김옥균이 총에 맞았다. 쏜 사람은 김옥균과 같은 배로 상하이에 온 조선인이었다.

김옥균이 맞은 총알
3
1894년 3월 28일 오후, 상하이 동화양행 2층 객실

김옥균은 자객을 알아보는 사람이었다. 조선 조정은 1885년과 1886년에 자객을 일본으로 보냈고, 두 번 다 김옥균이 먼저 알아챘다. 1886년 이후 여덟 해 동안, 조선 조정이 보낸 자객은 김옥균에게 닿지 못했다.

자객을 두 번 알아본 김옥균이, 조선인 한 사람을 곁에 두고 상하이행 배에 올랐다. 여덟 해를 살아남은 사람이 스스로 곁을 내준 동행이었다.

CH. 2

김옥균의 정권은 사흘 만에 끝났다

1884년 12월 4일, 우정국

1884년 12월 4일 저녁, 서울. 조선의 첫 우체국인 우정국 개국 축하연 자리에서 김옥균과 젊은 개화파 관료들이 정변을 일으켰다. 새 내각이 섰고, 개혁 정강이 나왔다.

사흘째 되던 12월 6일, 청군이 창덕궁으로 들어왔다. 정변은 끝났다. 김옥균은 퇴각하는 일본군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갔고, 망명은 아홉 해를 넘겼다.

조선에서 김옥균이 잡은 권력
3일
일본에서 김옥균이 보낸 망명
9년

일본은 김옥균을 잠깐 반겼다가 곧 냉담해졌다. 청을 자극하고 싶지 않은 일본 정부에게 망명객 김옥균은 짐이었다. 김옥균은 이와타 슈사쿠(岩田周作)라는 일본 이름으로 각지를 떠돌았다.

이름을 바꾸는 것으로는 부족했다. 조선은 김옥균의 송환을 거듭 요구했고, 자객까지 바다를 건너오면서 김옥균의 체류는 조선과 일본 사이의 외교 문제가 됐다. 1886년 8월, 일본 정부는 김옥균을 태평양 한가운데 오가사와라섬으로 보냈다. 2년 뒤에는 북쪽 끝 홋카이도 삿포로로 옮겼다.

CH. 3

김옥균은 자기를 무너뜨린 나라로 갔다

자객 두 명, 그리고 남은 문 하나

조선 조정이 보낸 자객은 실제로 왔다. 1885년 6월에 장은규가 일본에 닿았고, 1886년 2월 23일에는 지운영이 인천을 떠났다. 두 번 다 김옥균이 먼저 알아챘고, 두 번 다 시도로 끝났다.

자객이 다녀간 뒤, 김옥균이 한 일은 몸을 숨기는 것이 아니었다. 1886년, 김옥균은 고종에게 올릴 상소문을 썼다. 자기를 죽이러 사람을 보낸 임금에게 나라를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 적어 보내는 글이었다. 조선으로 전할 길이 없어 일본 신문에 실었다.

전하의 간신은 원세개 등과 같은 무식의 무리와 결당하여 국권을 업신여기니, 신이 이를 좌시하지 못하는 바입니다
김옥균이 1886년 고종에게 올린 상소문 (현대어 옮김)

자객을 보낸 조정을 향해 쓴 글에서, 김옥균은 자기를 신(臣)이라 불렀다.

오가사와라와 홋카이도에서 4년을 보내고 1890년 도쿄로 돌아왔지만, 김옥균의 살림은 곤궁했다. 조선은 자객을 보냈고, 일본은 섬에 가뒀다. 김옥균 앞에 열려 있는 문은 하나였다.

갑신정변을 사흘 만에 끝낸 군대는 청군이었다. 1894년, 일본 주재 청 공사를 지낸 이홍장의 양자 이경방이 김옥균을 상하이로 불렀다. 청의 실권자 이홍장과 손을 잡고 다시 서겠다는 계산이었다. 3월 11일, 김옥균이 도쿄를 떠났다. 자기를 무너뜨린 나라의 손을 잡으러 가는 길이었다.

CH. 4

김옥균을 쏜 사람은 파리에서 왔다

홍종우, 1890년 마르세유

도쿄를 떠나는 김옥균 곁에는 일본인 수행원과 청 공사관 통역이 있었다. 고베에서 상하이행 배에 오를 때, 일행에 조선인 한 사람이 끼어 있었다. 홍종우. 프랑스에서 돌아와 일본에 머물던 유학생이었다.

홍종우는 조선 사람 가운데 처음으로 프랑스에 유학한 사람이다. 1890년 마르세유에 내려 파리로 갔고, 동양 미술을 다루는 기메박물관에서 일했다. 1892년 파리에서는 프랑스 소설가 로니와 함께 춘향전을 프랑스어로 옮겨 『향기로운 봄(Printemps Parfumé)』이라는 제목으로 내놓았다.

1892년 파리
춘향전을 프랑스어로 옮긴 조선의 첫 프랑스 유학생
1894년 상하이
김옥균에게 권총 세 발을 쏜 자객

홍종우를 김옥균 곁에 붙인 사람은 이일직이었다. 민씨 척족 정권이 일본에 잠입시킨 자객이다. 프랑스에서 돌아온 홍종우에게 이일직이 김옥균 암살을 제의했다. 김옥균은 이일직의 계략 안에서 상하이행 배를 탔다.

자객을 두 번 알아본 김옥균이 왜 홍종우는 알아보지 못했는가. 홍종우는 자객의 얼굴로 오지 않았다. 조선 사람 가운데 서양을 제 눈으로 보고 온 사람은 드물었고, 홍종우가 드문 한 사람이었다. 조선을 열어야 한다고 말하다 사흘 만에 모든 것을 잃은 김옥균에게, 파리에서 돌아온 조선인은 경계할 사람이 아니라 궁금한 사람이었다. 김옥균이 조선에 들이려 한 세계를, 홍종우는 두 눈으로 보고 온 참이었다.

1894년 3월 27일, 김옥균이 고베에서 탄 사이쿄마루가 상하이에 닿았다. 이튿날 오후, 동화양행 2층 객실에서 홍종우가 한복의 넓은 소매에 숨긴 6연발 권총을 꺼냈다. 세 발이었다.

CH. 5

김옥균의 무덤에는 몸이 없다

양화진, 그리고 아산

1894년 4월, 청은 김옥균의 시신과 홍종우를 군함 위정호에 실어 조선에 넘겼다. 양화진 백사장에서 조선 정부는 이미 숨진 김옥균의 시신을 능지처참하고 목을 내걸었다. 효수대에는 팻말이 함께 걸렸다.

모반 대역부도 죄인 옥균, 당일 양화진두 능지처참
양화진 효수대에 걸린 팻말

홍종우는 벌을 받지 않았다. 1894년 4월 김옥균의 시신과 함께 조선으로 돌아온 홍종우를 조정이 맞았고, 홍종우는 홍문관 교리에 임명됐다.

김옥균이 죽은 이듬해, 개화파 내각이 김옥균을 사면하고 복권했다. 1896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옮긴 뒤, 복권은 취소됐다. 1910년, 순종이 김옥균에게 규장각 대제학을 추증하고 충달(忠達)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충청남도 아산 영인면에 김옥균의 무덤이 있다. 무덤 안에 김옥균의 몸은 없다. 능지처참 뒤 일본인 지인들이 김옥균의 옷과 머리카락을 몰래 거뒀고, 도쿄 아오야마 공원묘지 외국인 묘역에 묻혔다고 전한다. 1912년 12월 3일, 아산군수로 있던 양자 김영진이 아산으로 옮겨 묘를 세웠다. 옷과 머리카락만 묻힌 의발묘(衣髮墓)다. 1884년 조선에서 김옥균의 시간은 사흘이었다. 조선 땅이 김옥균에게 마지막으로 내준 것은, 머리카락과 옷 한 벌이 들어간 무덤 한 자리였다.

— 끝 —
카톡 한 줄

김옥균이 마지막에 곁을 내준 사람은, 파리에서 춘향전을 프랑스어로 옮긴 조선의 첫 프랑스 유학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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