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멜바이스가 찾은 범인은 자기 손이었다
1847년 3월 20일, 빈. 여행에서 돌아온 제멜바이스가 친구의 부검 기록을 펼쳤다. 사인은 자기 환자들의 것과 같았다.
친구 콜레치카의 사인이 산모들과 같았다
1847년 3월 20일, 빈 종합병원
베네치아 여행에서 돌아온 제멜바이스가 병원에서 들은 첫 소식은 친구의 부고였다. 법의학 교수 야코프 콜레치카가 부검을 지도하다 학생의 칼에 손가락을 찔렸고, 찔린 상처로 죽었다.
제멜바이스가 콜레치카의 부검 기록을 펼쳤다. 기록에 적힌 소견은 제멜바이스가 매일 보던 산모들의 것과 같았다.
1847년 5월, 제멜바이스는 산모를 죽이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냈다. 1848년 제1산과의 사망률은 1.27%로 내려갔다. 답을 찾아낸 제멜바이스는 18년을 더 살았고, 마지막 2주를 정신병원에서 보냈다.
산모들이 무릎 꿇고 빌었다
1846년 7월, 빈 종합병원 두 산과
1846년 7월 1일, 스물여덟 살의 제멜바이스가 빈 종합병원 제1산과 조수로 부임했다. 제1산과는 의대생이 실습하는 병동이었고, 옆의 제2산과는 조산사가 실습하는 병동이었다. 산모가 어느 쪽으로 들어가는지는 입원한 날짜가 정했다.
빈의 산모들은 두 병동의 차이를 알고 있었다. 제1산과로 보내지 말아 달라고 무릎을 꿇고 비는 산모가 있었고, 병원으로 오는 길에 아이를 낳았다고 하고 들어오는 산모도 있었다.
제멜바이스는 병동의 조건을 하나씩 지워 나갔다. 제2산과가 더 붐볐으니 혼잡은 이유가 아니었고, 두 병동은 같은 건물에 붙어 있었으니 공기나 날씨도 이유가 아니었다. 분만 자세를 바꿔 봤고, 임종 성사를 하러 온 신부가 종을 울리며 병실을 지나가던 길도 바꿔 봤다. 사망률은 내려가지 않았다.
1847년 3월 초, 제멜바이스는 빈을 떠나 베네치아로 갔다. 산모가 죽어 나가는 병동에서 잠시 벗어나려는 여행이었다.
제멜바이스가 손을 씻으라고 명령했다
빈으로 돌아온 1847년 봄, 부검실과 분만실 사이
콜레치카의 몸에서 나온 소견은 림프관염, 복막염, 심낭염, 뇌수막염이었다. 산욕열로 죽은 산모를 열어 볼 때마다 제멜바이스가 적어 온 것과 같은 목록이었다. 콜레치카를 죽인 것은 학생의 칼에 시신에서 묻어 온 무언가였다.
“밤이고 낮이고 콜레치카의 병이 눈앞에서 떠나지 않았다. 콜레치카가 죽은 병이 수많은 산모가 죽어 간 병과 같다는 것을, 나는 점점 더 분명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같은 것이 산모의 몸에 들어갔다면, 옮긴 것은 손이었다. 제1산과의 의사와 의대생은 아침에 부검실에서 시신을 열고, 손을 씻지 않은 채 분만실로 건너가 산모를 진찰했다. 조산사 병동인 제2산과 사람들은 부검실에 들어가지 않았다.
부검실과 분만실을 매일 오간 손 가운데에는 제멜바이스 자신의 손도 있었다.
1847년 5월 15일, 제멜바이스는 제1산과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에게 지시했다. 부검실에서 나온 사람은 염화석회를 푼 물에 손을 씻고 분만실에 들어올 것. 비누로는 부검실 냄새가 손에서 지워지지 않았고, 염화석회는 지워냈다. 제멜바이스는 냄새가 사라지는 것을 손이 깨끗해졌다는 표시로 삼았다. 지시는 곧 산모를 죽여 온 것이 제1산과 사람들의 손이라는 선언이었다. 제멜바이스는 선언을 거둘 생각이 없었다.
1847년 4월 제1산과의 사망률은 18.3%였다. 지시가 내려간 뒤 6월은 2.2%, 7월은 1.2%였다.
제멜바이스가 편지에 살인자라고 썼다
1849년 3월 빈, 1861년 페스트
숫자는 내려갔지만 빈 의료계는 설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시신에서 나온 무엇이 병을 옮긴다는 말은, 손을 씻지 않고 산모를 받아 온 모든 의사에게 자기 손을 보라는 말이었다. 1849년 3월 20일, 제1산과 책임자 요한 클라인은 제멜바이스의 조수 계약을 연장하지 않았다.
1850년, 제멜바이스는 빈을 떠나 헝가리 페스트로 돌아갔다. 1851년부터 성 로쿠스 병원 산과를 맡아 같은 지시를 내렸다. 1851년부터 1855년까지 933명이 아이를 낳는 동안 산욕열로 죽은 산모는 8명이었다.
1861년, 제멜바이스는 자기 이론을 책으로 냈다. 제목은 『산욕열의 원인, 개념, 예방』이었다. 서평은 차가웠고, 유럽의 강의실에서는 제멜바이스의 주장을 반박하는 말이 이어졌다. 제멜바이스는 산과 교수들에게 공개서한을 쓰기 시작했고, 편지 안에서 교수들을 살인자라고 불렀다.
제멜바이스에게 반대는 학설 다툼이 아니었다. 손을 씻지 않는 병동에서는 편지를 쓰는 동안에도 산모가 죽고 있었다. 제멜바이스는 죽은 산모를 세는 사람이 되어 있었고, 세는 목록에서 자기 이름을 빼지도 않았다.
“내 확신에 따라 말하자면, 나 때문에 무덤으로 먼저 간 환자가 몇 명인지는 오직 하느님만 아신다.”
1865년 7월 30일, 동료들이 새 시설을 보여 주겠다며 제멜바이스를 데리고 나섰다. 도착한 곳은 빈의 정신병원이었다. 나가려 하자 간수 여럿이 제멜바이스를 심하게 때렸고, 구속복에 묶어 어두운 방에 가뒀다.
2주 뒤인 1865년 8월 13일, 제멜바이스는 마흔일곱에 죽었다. 부검 기록에 적힌 사인은 패혈증이었다. 상처에서 시작해 피를 타고 번진 감염, 18년 전 빈에서 제멜바이스가 산모들의 사인으로 지목했던 것과 같은 종류였다.
제1산과의 숫자는 남았다
1848년의 장부, 1969년의 이름
제멜바이스의 뒤를 이어 제1산과를 맡은 의사는 설명을 글로는 부정했다. 그런데도 제1산과의 사망률은 1849년부터 몇 해 동안 낮게 유지됐다.
제멜바이스가 죽고 2년 뒤인 1867년, 조지프 리스터가 석탄산으로 상처를 소독하는 방법을 발표했다. 세균이 병을 옮긴다는 설명이 자리를 잡은 뒤에야 빈에서 손을 씻으라고 한 의사의 이름이 다시 불렸다. 1969년 11월 7일, 의학부가 세워진 지 200년 되는 날에 부다페스트의 의과대학은 학교 이름을 제멜바이스로 바꿨다.
제멜바이스가 남긴 것 가운데 가장 오래 남은 것은 두꺼운 책도, 유럽으로 보낸 공개서한도 아니다. 1847년 5월 빈 종합병원 제1산과에서 시작된 규칙 한 줄이다. 부검실에서 나온 손은 씻고 들어올 것.
손을 씻으라고 처음 말한 의사는 산욕열의 답을 찾은 순간 자기가 범인이라는 것도 알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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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상으로 보기출처 (14)
- 위키백과(영문) — Ignaz Semmelweis (1846년 제1산과 11.4%·제2산과 2.8%, 1846-07-01 조수 부임, 혼잡·기후·분만 자세·신부의 종 변수 제거, 무릎 꿇고 빈 산모와 거리 출산, 1847-04 18.3%→6월 2.2%·7월 1.2%, 1848년 1.27%, 1849-03-20 클라인의 계약 미연장, 성 로쿠스 933명 중 8명, 1861년 저서와 공개서한의 살인자 표현, 1865-07-30 유인과 정신병원·간수 폭행·구속복·어두운 방, 08-13 마흔일곱에 사망, 부검 사인 패혈증, 후임 시기 낮은 사망률 유지)
- 위키백과(영문) — Jakob Kolletschka (법의학 교수, 부검 지도 중 학생의 칼에 손가락 찔림, 1847-03-13 사망, 림프관염·복막염·심낭염·뇌수막염 소견, 제멜바이스의 1847년 3월 베네치아 체류와 3월 20일 귀환)
- PMC — Preventing sepsis in healthcare, 200 years after the birth of Ignaz Semmelweis (1847-05-15 염화석회 손 씻기 지시, 염화석회 1 대 물 24, 부검실에서 분만실로 이동 시 적용, 비누로 지워지지 않던 부검실 냄새가 염화석회 채택 이유)
- PMC — Semmelweis 인용 출처 (Ch.3 인용문 'Day and night I was haunted by the image of Kolletschka's disease…' 의 출처, K. Codell Carter 번역 The Etiology, Concept and Prophylaxis of Childbed Fever 19쪽 인용)
- Polgári Szemle(영문) — Ignaz Semmelweis, the Saviour of Mothers (Ch.4 인용문 'only God knows the number of patients who went prematurely to their graves because of me' 원문과 1861년 저서 출처, 공개서한 인용, 1865년 정신병원과 패혈증 사망)
- Science History Institute — Ignaz Semmelweis (제1산과 사망률 18.27%에서 1848년 1.27%로, 1849-03-20 요한 클라인의 해임, 페스트 성 로쿠스 병원, 1861년 저서, 정신병원 사망)
- Semmelweis University — History (1969-11-07 부다페스트 의과대학이 제멜바이스 이름을 채택, 나기솜버트 의학부 창설 200주년 기념일)
- 위키백과(영문) — Semmelweis University (1969년 개명 교차 확인)
- 위키백과(영문) — Joseph Lister (1867년 석탄산 소독법 발표 — Ch.5 '2년 뒤' 근거)
- Encyclopedia.com — Ignaz Philipp Semmelweis (1847-03-02 베네치아 출발, 산과 병동 경험으로 상한 심신 회복이 여행 목적, 03-20 귀환 직후 콜레치카 부고)
- Epidemiology & Infection (2017) Jadraque & Carter — What happened at Vienna's Allgemeines Krankenhaus after Semmelweis's contract as Assistant in the First Maternity Division was terminated? (1849년 이후 제1산과 사망률이 낮게 유지됨)
- James Lind Library (Loudon 2013) — Ignaz Phillip Semmelweis' studies of death in childbirth (두 산과의 격일 입원 배정, 임상적 선별 없음)
- PMC — A twenty-first century perspective on concepts of modern epidemiology in Ignaz Philipp Semmelweis' work on puerperal sepsis (두 산과가 같은 지붕 아래 대기실 공유)
- PMC — Joseph Lister and the performance of antiseptic surgery (1867년 3~7월 The Lancet 연재 6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