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Calypso · 글로벌 휴머니티· 공유받은 글

윈턴은 옆자리에 누가 앉았는지 몰랐다

1988년 2월 28일 런던 BBC 스튜디오, 진행자가 윈턴의 다락에서 나온 공책을 펼쳤다.

↓ 스크롤
CH. 1

명단을 적은 사람은 방청석에 앉아 있었다

1988년 2월 28일, 런던 BBC 스튜디오

무대 위에 펼쳐진 공책에는 아이들 사진이 붙어 있었고, 명단이 함께 있었다. 명단에는 아이 이름과 부모 이름, 아이를 맡은 영국 가정의 이름과 주소가 적혀 있었다. 공책을 적은 사람은 무대가 아니라 방청석 앞줄에 앉아 있었다.

명단이 적힌 해로부터 방송까지
49
명단은 1939년 프라하에서 만들어졌다.

방청석 앞줄의 남자는 니컬러스 윈턴, 일흔여덟 살이었다. 명단이 만들어진 것은 마흔아홉 해 전 프라하에서였고, 공책은 오래 윈턴의 집 다락에 올려져 있었다.

윈턴은 방송이 시작될 때까지, 자기 양옆에 누가 앉아 있는지 듣지 못했다.

CH. 2

윈턴은 스키 여행을 접고 프라하로 갔다

1938년 12월, 프라하

명단이 시작된 곳은 1938년 겨울 프라하였다. 1938년 9월 뮌헨 협정으로 체코슬로바키아는 국경 지대를 독일에 넘겼다. 국경 지대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프라하로 몰렸고, 겨울을 앞두고 임시 수용소가 늘어섰다. 유대인 가족들이 특히 급했다.

런던 증권거래소에서 일하던 스물아홉 살 니컬러스 윈턴은 1938년 12월 스위스로 스키를 타러 갈 참이었다. 출발을 앞두고 친구 마틴 블레이크가 전화를 걸어 왔다. 프라하에서 난민 일을 도울 사람이 필요하니 와 달라는 말이었다.

스키는 가져오지 마.
마틴 블레이크가 윈턴에게 건 전화에서

프라하에 도착한 윈턴을 블레이크의 동료 도린 워리너가 난민 수용소로 데려갔다. 수용소마다 아이들이 있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아이들을 영국으로 옮기는 조직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지만, 체코슬로바키아 아이들을 맡은 곳은 없었다.

맡은 곳이 없으니 윈턴이 직접 접수를 시작했다. 바츨라프 광장 호텔 방에 식탁 하나를 놓자 아이를 보내려는 부모들이 찾아왔고, 윈턴은 면도를 하는 동안에도 신청서를 받았다. 3주 뒤 런던으로 돌아갈 때, 명단은 이미 길어져 있었다.

CH. 3

윈턴은 내무부 허가증을 위조했다

1939년 봄, 런던

영국은 조건을 걸었다. 아이는 열일곱 살 미만이어야 했고, 받아 줄 위탁가정이 있어야 했고, 한 명당 50파운드를 보증금으로 걸어야 했다. 지금 돈으로 3,000파운드에 가까운 액수였다. 명단에 이름을 올리는 것과 아이를 영국으로 데려오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윈턴은 낮에 증권거래소에서 일하고, 저녁과 주말에 위탁가정과 보증금을 모았다. 윈턴과 어머니, 조수 몇 명이 영국 신문에 광고를 냈고, 1939년 여름 내내 주간지 픽처 포스트에 아이들 사진을 실었다. 이름만 적힌 목록보다 아이들 사진이 사람을 움직인다고, 윈턴은 훗날 말했다.

1939년 3월 14일, 첫 아이들이 비행기로 프라하를 떠났다. 다음 날 독일군이 프라하로 들어왔다. 명단에 남은 아이들은 독일이 점령한 도시 안에 있었다.

런던에는 관문이 하나 더 있었다. 위탁가정이 정해지고 보증금이 모여도, 내무부가 입국 허가를 내주지 않으면 아이는 영국에 들어올 수 없었다. 서류는 제때 나오지 않았다. 독일군이 체코슬로바키아 전역을 차지한 뒤로, 윈턴은 내무부가 서류를 내주기를 기다리는 일에 더는 버티지 못했다.

윈턴은 기다리는 대신 내무부 입국 허가증을 위조했다. 런던 증권거래소에서 주식을 사고팔던 스물아홉 살 직원이 영국 정부 서류를 손으로 만들어 냈다.

CH. 4

1939년 9월 1일, 기차는 떠나지 못했다

1939년 봄부터 여름까지, 프라하와 런던

런던에서 서류가 만들어져도 아이들은 아직 프라하에 있었다. 프라하 쪽 일은 영국인 교사 트레버 채드윅이 맡았다. 채드윅은 떠날 아이들의 출국 도장을 게슈타포에게서 받아냈다. 3월 14일 비행기에 이어진 일곱 번은 기차였다. 채드윅은 1939년 6월 초 프라하를 빠져나갔고, 뒤이은 수송은 프라하에 남은 사람들이 이었다.

런던 쪽 일은 줄지 않았다. 프라하에 아이가 남아 있어도 받아 줄 집이 없으면 기차에 태울 수 없었다. 1939년 3월부터 8월까지 여덟 번, 669명이 프라하를 떠나 영국에 닿았다. 8월 2일 기차가 여덟 번째였다.

다음 수송은 9월 1일로 잡혀 있었다. 아홉 번째 기차는 앞선 여덟 번의 어느 수송보다 규모가 컸다.

1939년 9월 1일 아홉 번째 기차에 타기로 한 아이
250
런던의 위탁가정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다. 국경이 닫혔고, 아홉 번째 기차는 프라하를 떠나지 못했다. 같은 날 런던 리버풀 스트리트 역에는 아이를 데리러 나온 가정들이 서 있었다. 윈턴은 훗날, 250명 가운데 다시 소식이 들려온 아이는 한 명도 없었다고 말했다.

전쟁이 끝난 뒤 윈턴은 명단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는 동안에도 아내 그레테는 알지 못했다. 비밀로 한 적은 없고 말을 안 했을 뿐이라고, 윈턴은 훗날 말했다. 아이들 사진과 명단이 붙은 공책은 다락으로 올라갔고, 1939년에 프라하를 떠난 아이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는 명단을 적은 윈턴도 알지 못했다.

1980년대 후반, 그레테가 다락을 정리하다 공책을 꺼냈다.

CH. 5

스물네 명이 넘는 사람이 윈턴을 둘러싸고 일어섰다

1988년 2월과 7월, 런던 BBC 스튜디오

공책은 홀로코스트 연구자 엘리자베스 맥스웰에게 건네졌다. 맥스웰은 명단에 적힌 위탁가정 주소로 편지를 보냈고, 영국에서 80명이 확인됐다. 영국이 받아 준 나이가 열일곱 살 미만이었으니, 1988년에 편지를 받은 사람들은 모두 마흔 살을 넘긴 어른이었다.

1988년 2월 28일 방송에서 진행자 에스터 란첸이 무대에서 공책을 펼쳤다. 그리고 윈턴 옆자리에 앉아 있던 여자를 소개했다. 베라 기싱, 1939년 프라하에서 기차를 탄 아이였다.

1988년 7월 3일 방송된 다음 편에는 윈턴이 보낸 아이들이 방청석을 채웠다. 란첸이 방청석을 향해 물었다.

오늘 방청석에 니컬러스 윈턴에게 목숨을 빚진 분이 계십니까? 계시다면 일어나 주시겠습니까?
에스터 란첸, BBC 「댓츠 라이프!」 1988년

윈턴을 둘러싸고 앉아 있던 스물네 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일어섰다. 1939년 프라하에서 기차를 탄 아이들이었다. 니컬러스 윈턴은 2003년 기사 작위를 받았고, 2015년 7월 1일 106세로 세상을 떠났다.

윈턴이 1939년 공책에 적은 이름은 664개였다. 2002년 조사에서 다섯 명이 더 확인돼 669명이 됐다. 명단에는 아이를 맡은 영국 가정의 주소가 함께 적혀 있었다. 1988년 방청석에서 사람들이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1939년 프라하에서 이름을 받아 적던 사람이 주소까지 같이 적어 뒀기 때문이다.

— 끝 —
카톡 한 줄

1988년 BBC 방청석에서 스물네 명이 넘는 사람이 일어설 수 있었던 건, 윈턴이 1939년 명단에 위탁가정 주소까지 적어 뒀기 때문이다.

공유한 글은 영원히 남아요. 받은 사람도 같은 글을 볼 수 있어요.

▶ 영상으로 보기
출처 (14)
내일, 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