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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0달러짜리 상자에 필름 3만 장이 들어 있었다

2007년 시카고 포티지파크 경매장에서 말루프가 380달러를 냈다. 상자 안에 필름 3만 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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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 1

말루프는 상자를 다락에 올려 뒀다

2007년, 시카고 포티지파크

밀워키 애비뉴의 경매장에 창고 하나가 통째로 나온 날, 존 말루프는 가장 큰 상자를 골라 380달러를 냈다. 임대료가 밀려 창고 회사가 넘긴 짐이었고, 경매장은 짐을 상자 단위로 다시 팔았다.

말루프는 시카고에서 부동산 중개인으로 일하면서 포티지파크 동네 역사를 담은 사진집을 함께 쓰고 있었다. 필요한 것은 동네 옛 사진이었다. 상자를 열자 필름이 나왔다. 3만 장가량이었다.

말루프가 상자 하나에 낸 돈
380달러
말루프가 찾던 것은 동네 옛 풍경 사진이었다.

사진집에 넣을 만한 동네 풍경은 없었다. 말루프는 상자를 다락에 올려 뒀다. 필름을 찍은 사람의 이름 석 자를 말루프가 손에 쥔 것은 2009년 봄이다.

CH. 2

마이어는 허리께에서 셔터를 눌렀다

1926년 뉴욕에서 1956년 시카고까지

필름 3만 장을 찍은 사람은 비비안 마이어였다. 1926년 2월 뉴욕에서 태어났고, 1951년 뉴욕으로 돌아왔다. 곧 입주 유모 일을 시작했고, 1952년에 롤라이플렉스를 한 대 샀다.

롤라이플렉스는 눈에 대고 보는 카메라가 아니었다. 가슴께에 걸고 위 뚜껑을 열어 유리판을 내려다보는 동안, 찍히는 사람은 카메라가 자기를 향한 줄 몰랐다. 마이어는 롤라이플렉스를 허리 높이에 들고 찍었다.

나는 일종의 스파이예요.
직업을 묻는 사람에게 비비안 마이어가 했다고 전해지는 대답

마이어의 하루는 아이를 데리고 걷는 시간으로 채워졌다. 목에는 늘 롤라이플렉스가 걸려 있었다. 걸어간 곳은 공원만이 아니었다. 마이어는 시카고의 험한 동네로도 아이들을 데리고 들어갔고, 필름에는 거리에서 자는 사람과 모피를 걸친 부인, 헐리는 건물이 나란히 남았다.

1956년, 마이어는 시카고 북부 교외 하이랜드파크로 옮겼다. 겐스버그 집에서 아들 셋을 맡는 자리였다. 새로 얻은 방에는 자기 욕실이 딸려 있었고, 욕실은 곧 마이어의 첫 암실이 된다.

CH. 3

마이어는 욕실을 암실로 바꿨다

1956년부터 1972년까지, 하이랜드파크

겐스버그 집에서 마이어의 욕실은 암실이 됐다. 마이어는 찍은 흑백 필름을 직접 현상하고 인화했다. 유모 일과 사진 일이 방 하나 안에서 붙어 돌아갔다.

마이어가 일자리를 구할 때마다 내건 조건이 하나 있었다. 방문에 자물쇠를 달 것. 겐스버그 집에서도 마이어의 방문은 잠겨 있었다. 잠긴 문 안쪽에 암실이 있었다.

겐스버그 형제는 마이어가 사진 찍는 모습을 늘 봤다. 인화한 사진을 본 적은 드물었다. 마이어의 사진은 마이어가 살아 있는 동안 화랑에 걸린 적도, 사진집에 실린 적도 없다. 마이어는 사진을 내보이는 대신 방문을 잠갔다.

하이랜드파크의 자리는 열여섯 해 갔다. 1972년, 아들 셋이 유모를 필요로 하지 않는 나이가 되면서 마이어는 겐스버그 집을 나왔다. 욕실 암실도 함께 없어졌다.

CH. 4

봉투에 연필로 이름이 적혀 있었다

1972년부터 2009년 4월까지, 시카고

1972년 이후 마이어가 얻은 유모 자리는 짧았고 자주 바뀌었다. 암실이 딸린 방은 다시 오지 않았다. 마이어는 계속 찍었고, 현상하지 않은 필름이 상자에 쌓였다.

짐은 줄지 않았다. 신문 더미와 필름 상자를 셋집마다 들고 옮길 수 없게 되자 마이어는 창고를 빌렸다. 유모 일이 끊긴 뒤 창고 임대료는 그대로 부담이 됐다.

임대료가 밀리자 2007년 창고 회사는 안에 든 짐을 처분했다. 짐은 포티지파크 경매장으로 넘어갔고, 가장 큰 상자를 산 사람이 존 말루프였다. 말루프가 다락에서 상자를 다시 내린 것은 한 해쯤 지나서였다.

말루프는 필름을 스캔하기 시작했다. 스캔이 쌓일수록, 상자 안의 사진이 동네 사진집에 넣을 옛 풍경 자료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사진의 수준을 알아본 뒤에도, 필름을 찍은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2009년 4월 말, 말루프가 상자 안에서 사진 현상소 봉투 하나를 찾아냈다. 봉투에는 연필로 이름이 적혀 있었다. 비비안 마이어. 검색창에 이름을 넣자 걸려 나온 것은 짧은 부고 하나였다. 며칠 전 시카고 트리뷴에 실린 부고였다.

영화 평론가이자 빼어난 사진가.
2009년 4월 23일 시카고 트리뷴에 실린 비비안 마이어 부고 — 마이어가 돌봤던 겐스버그 형제가 냈다

비비안 마이어는 2009년 4월 21일 여든셋으로 세상을 떠났다. 말년의 마이어를 로저스파크 아파트에 들인 사람도, 마이어를 사진가라고 적은 사람도 겐스버그 형제였다. 말루프가 필름을 찍은 사람의 이름을 알아낸 것은 마이어가 세상을 떠난 지 며칠 뒤였다.

CH. 5

마이어가 못 본 사진을 세상이 먼저 봤다

2009년 10월부터 지금까지

2009년 10월, 말루프가 스캔한 사진 몇 장을 사진가들이 모인 온라인 모임에 올렸다. 반응은 곧 돌아왔다. 말루프는 같은 경매에서 상자를 사 간 다른 낙찰자들을 찾아다니며 남은 필름을 사 모았고, 모은 사진은 10만 장으로 늘었다. 2011년 1월, 시카고 문화센터가 마이어의 사진 일흔두 장을 걸었다. 미국에서 열린 첫 전시였다.

말루프가 모은 자료에는 현상되지 않은 흑백 필름이 들어 있었다. 말루프의 손에서 전부 현상돼 스캔됐다. 아직 손대지 않은 컬러 필름 700통은 냉장고에 들어가 있다.

마이어가 남긴 현상되지 않은 흑백 필름
2,000
필름 안의 사진은 마이어도 본 적이 없다.

하이랜드파크 욕실에서 마이어가 직접 인화하던 시절은 1972년에 끝났다. 상자에 남은 필름을 현상해 사진으로 만든 사람은 마이어가 아니라 말루프였다.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 10만 장이 세상에 나온 길은 화랑도 사진집도 아니었다. 시작은 밀린 창고 임대료였고, 다음은 380달러에 팔린 상자였다.

— 끝 —
카톡 한 줄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 10만 장이 세상에 나온 건 창고 임대료가 밀려 짐이 통째로 경매에 넘어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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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