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Calypso · 한국 현대사· 공유받은 글

전두환을 살린 건 고장 난 승용차였다

1983년 10월 9일 오전 10시 28분, 랭군 아웅산 묘소. 지붕에서 폭탄이 터졌다. 전두환은 아직 오는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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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 1

전두환은 묘소에 없었다

1983년 10월 9일 오전 10시 28분, 랭군

버마 랭군의 아웅산 묘소에서 지붕이 통째로 내려앉았다. 참배 행사를 기다리며 앞줄에 도열해 있던 한국 정부 수행단 위였다. 대통령 전두환은 그 자리에 없었다.

아웅산 묘소에서 목숨을 잃은 한국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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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총리 서석준, 외무부 장관 이범석, 대통령 비서실장 함병춘, 주버마 대사 이계철이 포함돼 있었다.

폭탄은 대통령이 도착하기 전에 터졌다. 전두환이 묘소로 들어올 예정 시각은 오전 10시 30분이었다. 스위치는 10시 28분에 눌렸다.

CH. 2

세 사람이 화물선으로 랭군에 닿았다

1983년 9월, 북한의 한 항구에서 랭군까지

폭발이 있기 한 달 전, 전두환의 순방 일정이 잡혀 있었다. 서남아시아와 대양주 여섯 나라를 도는 길이었고, 첫 방문지가 버마였다. 일정 안에는 랭군의 아웅산 묘소 참배가 들어 있었다.

버마는 남과 북 어느 쪽에도 서지 않는 나라였다. 두 나라 모두와 국교를 맺고 있었다. 랭군 한 도시 안에 대한민국 대사관과 북한 대사관이 함께 있었다.

서울
랭군에 대사관이 있었다
평양
랭군에 대사관이 있었다

9월, 북한 인민무력부 정찰국 소속 세 사람이 화물선에 올랐다. 김진수, 신기철, 강민철. 랭군항에 닿은 것은 9월 중순이었다. 세 사람이 받은 임무는 하나였다.

전두환이 아웅산 묘소에 참배하러 들어오는 순간에 맞춰 폭탄을 터뜨리는 일이었다. 폭탄을 묘소에 올려놓는 일보다 어려운 것은 시각이었다. 원격으로 터뜨리려면 대통령이 묘소로 들어서는 순간을 묘소 밖에서 알아내야 했다.

CH. 3

세 사람이 묘소 천장에 폭탄을 매달았다

1983년 10월 7일 새벽, 아웅산 묘소

전두환의 아웅산 묘소 참배는 10월 9일 오전으로 잡혀 있었다. 세 사람은 참배 이틀 전 새벽을 골랐다. 하루 전에 묘소를 한 차례 둘러본 뒤였다.

10월 7일 새벽, 세 사람이 묘소 지붕으로 올라갔다. 천장에 클레이모어 두 개와 소이탄 한 개를 매달고 원격 기폭 장치를 연결했다. 폭탄을 천장에 붙인 순간부터 세 사람에게 물러설 길은 없었다. 폭탄은 이틀 동안 묘소 천장에 매달린 채로 있게 됐다.

묘소 천장에 매단 폭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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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뒤 실제로 터진 것은 한 개였다.

폭탄을 매단 뒤 세 사람은 묘소에서 떨어진 자리로 물러났다. 폭파 시점으로 정한 신호는 소리였다. 참배가 시작될 때 묘소에서 울릴 소리였다.

CH. 4

애국가 예행연습이 한 번 더 울렸다

1983년 10월 9일 오전, 영빈관과 묘소 사이

10월 9일 오전, 전두환은 랭군 영빈관에서 묘소로 떠날 참이었다. 함께 갈 버마 외무장관의 승용차가 고장 났다. 전두환은 영접 요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눴다. 영빈관을 나선 시각은 예정보다 4분 늦었다.

전두환이 영빈관을 늦게 나선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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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도착 예정 시각은 오전 10시 30분이었다.

묘소에서는 수행단이 예행연습을 마치고 대통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전 10시 26분쯤, 차량 정체로 대통령이 30여 분 늦는다는 연락이 앞줄에 닿았다. 기다릴 시간이 생기자 수행단은 애국가 예행연습을 한 번 더 했다.

예행연습이 다시 시작될 무렵 이계철 주버마 대사가 묘소에 들어섰다. 이계철도 전두환과 마찬가지로 머리가 벗겨져 있었다. 신기철은 묘소에 들어선 사람을 전두환으로 보았고, 다시 울리는 애국가를 참배가 시작된 소리로 들었다.

10시 28분, 신기철이 스위치를 눌렀다. 천장에 매단 세 개 가운데 한 개가 터지면서 지붕이 아래로 내려앉았다. 전두환을 태운 차는 아직 묘소로 오는 길 위에 있었다.

세 사람은 랭군을 빠져나가려다 붙잡혔다. 신기철은 총격전 끝에 사살됐고, 김진수와 강민철은 쥐고 있던 수류탄이 터져 중상을 입은 채로 생포됐다. 붙잡힐 때 강민철은 스물여덟이었다.

북한은 사건과 무관하다고 했다. 노동신문과 중앙방송을 통해, 남조선 안기부가 꾸민 자작극이라고 했다. 생포된 두 사람이 랭군에 살아 있는 동안 나온 말이었다. 김진수는 수사관 앞에서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강민철은 반대쪽을 골랐다. 강민철은 범행 사실을 인정했고, 북한이 보낸 공작원이라는 것까지 시인했다. 강민철이 스스로 시인한 뒤에도, 북한은 강민철을 자국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CH. 5

강민철이 인세인에서 스물다섯 해를 살았다

1983년부터 2008년 5월까지, 인세인 교도소

1983년 11월 4일, 버마 정부는 북한과 국교를 끊고 국가 승인까지 취소했다. 코스타리카와 사모아도 북한과 국교를 끊었다. 랭군에서는 김진수와 강민철의 재판이 11월 22일에 시작됐다.

재판에서 김진수와 강민철은 나란히 사형을 선고받았다. 김진수는 1985년 4월 형이 집행됐다. 강민철은 수사에 협조한 점이 참작돼 사형을 면했다.

북한에 속았으며, 석방된다면 제3국이 아닌 한국에 가서 참회하며 살겠다.
2003년 10월 주간조선이 전한, 수감 20년째 강민철이 버마 당국에 밝힌 뜻

강민철은 랭군 북쪽 인세인 교도소의 정치범 수용소에서 스물다섯 해를 살았다. 한국으로 가는 길은 열리지 않았고, 나중에는 남과 북 어느 쪽으로도 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2008년 5월 18일, 강민철은 쉰셋으로 인세인 교도소에서 죽었다.

북한은 아웅산 묘소의 폭탄을 끝내 자기 소행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1983년 10월 9일 랭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입을 연 사람은 강민철이었다. 묘소 천장에 폭탄을 매단 세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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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아웅산에서 폭탄이 전두환보다 2분 먼저 터진 건, 범인이 애국가 예행연습을 참배 시작으로 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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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9)
내일, 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