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Calypso · 한국 인물· 공유받은 글

우승자 이름은 손기정이 아니었다

1936년 8월 9일 베를린. 마라톤 1등이 시상대에서 고개를 숙이고, 손에 든 화분으로 가슴을 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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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 1

마라톤 1등이 고개를 숙였다

1936년 8월 9일, 베를린 올림픽 스타디움

마라톤을 1등으로 끊은 남자가 시상대 맨 윗칸에 올라섰다. 남자는 손에 든 화분을 가슴께로 끌어올려 유니폼 한가운데를 덮었다.

트랙을 달린 사람
손기정 · 평안북도
기록지에 적힌 이름
손 기테이 · 일본

42.195킬로미터를 2시간 29분 19초에 달린 다리는 평안북도에서 왔다. 손기정이 손기정이라는 이름으로 올림픽 스타디움에 들어서기까지는, 베를린 이후로 열두 해가 더 걸렸다.

CH. 2

손기정은 배달을 하고 밤에 달렸다

1912년, 평안북도

손기정은 1912년 평안북도에서 태어났다. 집에서 학교까지 약 2킬로미터 자갈길을 늘 뛰어서 오갔다. 소학교 6학년 때는 신의주와 만주 안동현 사이를 달리는 안의육상경기대회에 나가 청장년을 제치고 5,000미터에서 우승했다.

신의주 아이들 대부분은 보통학교를 마치면 바로 생계를 짊어졌다. 손기정도 학교를 더 다닐 형편이 아니었다. 일본으로 건너가 낮에는 음식점 배달을 하고 밤에는 달렸다.

일본에서도 학업은 이어지지 않았다. 손기정은 신의주로 돌아와 동일상사에 취직했고, 일이 끝나면 다시 달렸다. 손기정에게 달리기는 취미가 아니라 학교로 돌아가는 유일한 길이었다.

1932년, 손기정이 동아일보사가 연 경영 마라톤대회에서 2위를 했다. 2위 성적이 손기정을 양정고등보통학교로 데려갔다. 끊겼던 학업이 다시 이어졌고, 마라톤 훈련도 양정고보에서 처음 제대로 시작됐다.

1935년 11월 3일, 도쿄에서 손기정이 세운 기록
2시간 26분 42초
마라톤 세계 최고 기록이었다. 1947년 보스턴에서 제자 서윤복이 넘어설 때까지 12년 동안 남아 있었다.

손기정은 세계에서 가장 빨리 달렸다. 그런데 올림픽으로 가는 문은 하나뿐이었다. 일본 대표 선발전이었다. 1936년의 조선에는 조선 대표팀이 없었다.

CH. 3

손기정은 한자로 이름을 쓰지 않았다

1936년 8월 9일, 베를린 마라톤 코스

일본 대표팀 유니폼을 입은 손기정을 포함해 56명이 출발선에 섰다. 손기정은 레이스 후반에 선두로 나섰다. 결승선을 끊은 기록은 2시간 29분 19초, 올림픽 신기록이었다.

2위는 영국의 어니스트 하퍼였다. 3위는 손기정과 같은 유니폼을 입은 남승룡이었다. 남승룡도 조선 사람이었다. 마라톤 시상대 세 자리 가운데 둘을 조선 사람이 차지했는데, 기록지에는 둘 다 일본으로 적혔다.

시상식에서 일본 국가가 울렸다. 손기정은 우승 부상으로 받은 묘목 화분을 두 손으로 들어 올려 가슴의 일장기를 덮었다. 고개는 끝까지 들지 않았다. 화분을 든 자세로 찍힌 사진이 남았다.

베를린에서 손기정은 사인을 청하는 사람들에게 한자로 이름을 쓰지 않았다. 한글로 '손긔졍'이라 쓰고 옆에 'KOREA'라고 적었다.

한문으로 이름을 적지 않은 것은 일본인으로 오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고, Korea라고 적은 것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손기정이 밝힌 이유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손기정'

일본 사람이 사인 옆에 후지산을 그려달라고 하면, 손기정은 후지산 대신 금강산을 그려줬다. 베를린 시상대에서 찍힌 사진은 이미 조선으로 건너가는 중이었다.

CH. 4

동아일보가 일장기를 지웠다

1936년 8월, 경성

베를린 시상대 사진이 조선의 신문사에 닿았다. 8월 13일, 조선중앙일보가 손기정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흐릿하게 지운 사진을 실었다. 같은 날 동아일보 지방판 조간에도 일장기가 흐릿해진 사진이 나갔다. 총독부가 문제 삼은 것은 열이틀 뒤였다.

8월 25일 석간, 동아일보 체육기자 이길용이 조사부의 이상범 화백에게 시상대 사진을 넘겼다. 8월 13일과 달리 손기정의 가슴에서 일장기가 아예 사라졌고, 석간 2판이 인쇄돼 나갔다. 총독부는 당일로 신문 발매를 막고 관련자들을 붙잡아 갔다.

일장기 하나를 지운 값
신문 2개
동아일보는 8월 29일 자로 무기 정간에 들어갔고 사장 송진우가 물러났다. 조선중앙일보는 9월 5일 자진 휴간에 들어간 뒤 다시 나오지 못했고, 1937년 11월 발행 허가가 효력을 잃었다. 붙잡힌 기자와 직원들은 약 40일을 갇혔다.

1932년 손기정을 양정고보로 데려간 마라톤대회는 동아일보가 연 대회였다. 4년 뒤 동아일보는 손기정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웠고, 윤전기가 멈췄다.

손기정이 베를린 시상대에서 화분으로 덮은 자리를, 경성의 기자들은 지면 위에서 한 번 더 지웠다.

베를린 뒤 손기정은 보성전문학교에 들어갔지만 감시가 심해져 중퇴했다. 다시는 육상을 하지 않겠다는 조건을 달고서야 일본으로 건너갔고, 1940년 메이지대학 법학부에 들어갔다. 손기정은 선수로 다시 올림픽에 나가지 못했다.

CH. 5

손기정이 태극기를 들고 앞에 섰다

1948년 7월 29일, 런던 웸블리 스타디움

제14회 올림픽 개회식에서 한국 선수단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들어섰다. 태극기를 든 사람은 손기정이었다. 광복 뒤 태극기를 들고 나간 첫 하계올림픽이었고, 베를린에서 화분으로 가슴을 덮은 지 열두 해 만이었다.

1988년 9월 17일, 서울 잠실. 올림픽이 한국에서 열렸고, 개회식에서 손기정이 성화를 들고 주경기장 트랙으로 들어왔다.

1936년 베를린에서 화분을 들어 가슴을 덮었던 손이, 쉰두 해 뒤 서울에서 불을 들고 있었다. 1988년의 손기정은 아무것도 가리지 않았다.

— 끝 —
카톡 한 줄

손기정 시상대 사진이 지금까지 기억되는 건 금메달 때문이 아니라, 일장기를 지운 신문 두 개가 멈췄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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