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Calypso · 글로벌 휴머니티· 공유받은 글

밀을 키운 사람이 평화상을 받았다

1970년 10월, 멕시코 톨루카의 밀밭. 아내가 차로 한 시간을 달려와 소식을 전했다. 그는 장난인 줄 알았다.

↓ 스크롤
CH. 1

볼로그는 밭을 떠나지 않았다

1970년 10월, 톨루카 계곡

1970년 10월의 어느 아침, 멕시코시티에서 서쪽으로 65킬로미터 떨어진 톨루카 계곡의 시험 재배지. 노먼 볼로그는 동료 연구자들과 시험 구역 자료를 적고 있었다. 새벽 4시에 오슬로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은 사람은 멕시코시티에 있던 아내 마거릿이었고, 마거릿은 차로 한 시간 넘게 달려 밭까지 왔다.

마거릿이 전한 소식은 노벨 평화상이었다. 볼로그는 누가 장난을 친다고 여겼다.

믿고 안 믿고를 떠나, 볼로그는 밭에서 나오지 않았다. 톨루카 시험 재배 구역에는 하루치로 받아 적어야 할 자료가 아직 남아 있었다. 방송 카메라들이 톨루카 밀밭에서 볼로그를 찾아낸 것은 한참 뒤였다.

노벨 평화상 소식이 볼로그를 찾아 달려온 거리
65킬로미터
멕시코시티에서 톨루카 계곡 시험 재배지까지

1970년 노르웨이 노벨위원회가 평화상으로 고른 사람은 전쟁을 멈춘 지도자도, 조약에 서명한 외교관도 아니었다. 멕시코 밭에서 밀 품종을 만드는 농학자였다.

CH. 2

멕시코 밀밭이 녹병에 무너졌다

1944년, 스물여섯 해 전의 멕시코

밀밭에서 상을 받게 된 사연은 스물여섯 해를 거슬러 올라간다. 1944년, 멕시코 농업부와 미국 록펠러재단이 함께 밀 연구 사업을 열었다. 이유는 하나였다. 1939년부터 줄기녹병이 멕시코 밀밭을 훑고 지나가 수확이 무너졌고, 멕시코는 먹을 곡물의 상당량을 밖에서 사 와야 했다.

사업이 부른 사람 가운데 하나가 미국 화학회사 듀폰에서 미생물을 연구하던 노먼 볼로그였다. 듀폰은 붙잡으려고 연봉을 두 배로 올려주겠다고 했다. 멕시코 쪽이 내민 것은 녹병에 무너진 밀밭과 시험 재배지 몇 곳이었다.

듀폰이 내민 것
연봉 두 배
멕시코가 내민 것
녹병에 무너진 밀밭

볼로그는 인상안을 받지 않고 멕시코로 갔다. 도착해서 마주한 것은 실험실이 아니라, 녹병에 한 해 농사를 잃은 밀 농가였다. 밖에서 온 연구자를 미더워하지 않는 농가이기도 했다.

볼로그가 맡은 일은 녹병에 견디는 품종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런데 밀은 한 해에 한 번 자란다. 한 세대를 보려면 한 해를 기다려야 했고, 쓸 만한 품종 하나를 고르려면 여러 세대를 봐야 했다. 십 년이 넘게 걸리는 일이었다. 녹병에 밭을 잃고 있던 멕시코 농가에는 십 년이 없었다.

CH. 3

볼로그는 한 해에 두 번 심었다

1945년, 1,100킬로미터를 오간 씨앗

1945년, 볼로그가 사업 책임자에게 계획 하나를 냈다. 멕시코시티 근처 차핑고에서 여름에 한 번 심고, 거둔 씨앗을 북서쪽 소노라주 야키 계곡으로 실어가 겨울에 한 번 더 심겠다는 것이었다. 700마일, 1,100킬로미터 떨어진 두 밭이었다. 한 해에 두 세대. 십 년이 오 년으로 줄어든다.

반대가 나왔다. 당시 육종 교과서는 거둔 씨앗이 다시 심기 전에 쉬는 기간을 거쳐야 한다고 적고 있었다. 예산도 두 곳으로 갈라야 했다. 사업 책임자 조지 하라가 계획을 물렸다.

볼로그는 사표를 냈다. 미네소타 시절 스승이던 엘빈 스테이크먼이 양쪽을 주저앉혔고, 한 해 두 번 심는 방식은 그대로 시작됐다.

두 밭은 위도가 10도, 고도가 2,600미터 가까이 차이 났다. 낮 길이도, 흙도, 도는 병도 달랐다. 남쪽에서 살아남은 씨앗만 북쪽으로 갔고, 북쪽에서 또 살아남은 씨앗만 다음 세대로 갔다.

속도만 얻을 줄 알았던 방식에서 다른 것이 딸려 나왔다. 두 곳을 다 통과한 밀은 낮 길이를 가리지 않게 됐다. 밀은 원래 해가 길어지는 정도를 보고 이삭을 올리는데, 차핑고와 야키를 번갈아 통과한 계통은 낮 길이를 재는 감각이 무뎌져 있었다. 멕시코 밖 어느 위도에 심어도 자란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밀은 어느 선을 넘지 못했다. 거름을 넉넉히 주면 이삭이 커지고, 커진 이삭의 무게가 키 큰 줄기를 꺾었다. 쓰러진 밀은 거두지 못한다. 잘 먹인 밀일수록 잘 쓰러졌다.

CH. 4

일본에서 온 유전자가 밀 키를 낮췄다

1953년, 노린 10호

1953년, 볼로그가 미국 워싱턴주의 육종가 오빌 보겔에게서 씨앗을 얻었다. 보겔이 쓰던 재료는 일본 밀 '노린 10호'였다. 이와테현에서 이나즈카 곤지로가 키를 낮춰 만든 품종이고, 1946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있었다. 키 작은 밀은 줄기가 짧고 굵어서, 거름을 많이 줘도 이삭 무게를 버텼다.

볼로그는 노린 10호의 키를 낮추는 유전자를 녹병에 견디는 멕시코 계통에 넣었다. 키가 낮아지고, 낮 길이를 안 가리고, 녹병에 견디는 밀이 나왔다. 1962년과 1964년에 걸쳐 새 품종들이 멕시코 농가에 풀렸다.

1963년 멕시코 밀 수확은 1944년의 여섯 배가 됐고, 멕시코 밀밭의 95퍼센트가 키 작은 품종으로 바뀌었다. 밀을 사 오던 나라가 밀을 대는 나라가 됐다.

1965년, 인도와 파키스탄에 비가 오지 않았다. 두 나라 정부가 멕시코 씨앗을 사겠다고 했다. 볼로그가 실어 보낸 것은 트럭 서른 대분, 450톤가량이었다. 파키스탄으로 250톤, 인도로 200톤이 갔다.

씨앗을 실은 트럭들은 로스앤젤레스 항으로 가다가 와츠 폭동으로 막힌 길을 돌아야 했다. 배가 카라치와 봄베이(지금 뭄바이)로 향하는 사이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에 전쟁이 터졌다. 멕시코 창고에서 훈증 처리가 잘못돼, 도착한 씨앗은 절반도 싹이 트지 않았다. 볼로그는 씨앗을 두 배로 뿌리게 했다. 이듬해 인도 정부가 사들인 멕시코 씨앗은 1만 8천 톤이었다.

1965년 밀 수확
인도 1,230만 톤 · 파키스탄 460만 톤
1970년 밀 수확
인도 2,010만 톤 · 파키스탄 730만 톤

인도와 파키스탄의 수확 숫자가 바뀌던 1970년 10월, 노르웨이 노벨위원회가 노먼 볼로그를 골랐다. 두 달 뒤 오슬로 시상식에서 위원회가 밝힌 이유는 두 문장이었다. 첫 문장은 볼로그가 당대 누구보다도 굶주린 세상에 빵을 댄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두 번째 문장은 빵을 대는 일이 세상에 평화도 줄 것이라는 기대로 볼로그를 골랐다는 것이었다. 밀 품종을 만들던 농학자에게 평화상이 간 이유는 조약도 휴전도 아니라 빵이었다. 톨루카 밀밭까지 마거릿이 차로 달려와 전한 소식은, 밀을 키운 사람에게 붙은 평화상이라는 이름이었다.

CH. 5

볼로그는 일시적 승리라고 말했다

1970년 12월 11일, 오슬로

1970년 12월 11일, 오슬로에서 볼로그가 수상 강연을 했다. 강연에서 볼로그는 녹색혁명이 굶주림과의 싸움에서 거둔 것은 일시적인 승리라고 말했다. 사람에게 숨 돌릴 틈을 준 것뿐이라는 뜻이었다.

강연 끝에서 볼로그는 1969년 평화상을 받은 국제노동기구의 헌장 문구를 끌어왔다. 평화를 원한다면 정의를 가꾸라는 한 줄이었다. 볼로그는 국제노동기구의 한 줄에 자기 몫을 붙여 고쳐 적었다.

평화를 원한다면 정의를 가꾸십시오. 동시에 더 많은 빵을 낼 밭을 가꾸십시오. 그러지 않고서는 평화도 없습니다.
노먼 볼로그, 1970년 12월 11일 노벨 강연 — 국제노동기구 헌장 문구를 고쳐 적은 대목

볼로그가 만든 키 작은 밀은 1970년대 이후 아시아와 중동, 남아메리카 밀밭으로 퍼졌다. 볼로그와 볼로그에게 배운 사람들이 굶주림에서 건져낸 사람은 많게는 10억 명으로 추산된다.

노벨 평화상 소식이 톨루카 밀밭에 닿은 1970년 10월 아침, 볼로그는 밭에 남아 시험 구역 자료를 적었다. 오슬로가 상을 준 이유와, 볼로그가 밭에 남은 이유는 같은 것이었다.

— 끝 —
카톡 한 줄

1970년 노벨 평화상이 외교관이 아니라 밀 품종을 만들던 농학자에게 간 건, 빵을 대는 일이 평화도 줄 거라는 기대 때문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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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