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모르던 부족이 울었다
2010년 1월, 남수단 톤즈. 눈물을 수치로 여기던 부족이 그의 사진 앞에서 무너졌다.
딩카족이 눈물을 보였다
눈물을 모르는 부족
남수단 톤즈의 딩카족에게 눈물은 가장 큰 수치였다. 우는 것은 겁쟁이의 몫이라 여겨졌다.
2010년 1월, 톤즈의 딩카족이 한국인 한 사람의 사진 앞에서 울었다.
이름은 이태석. 부산에서 온 의사이자 사제였다.
부산 소년이 의사가 됐다
남부민동의 소년
1962년, 부산 남부민동. 이태석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가 삯바느질로 자식들을 키웠다.
초등학교 시절, 이태석은 한 편의 영화를 봤다. 한센병 환자들과 평생을 산 벨기에 신부 다미안의 이야기였다.
이태석은 의사가 되기로 했다. 1987년 인제대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의사의 길은 편안한 삶을 약속했다.
그러나 의사가 된 이태석은 1992년 신학교로 들어갔다. 서른의 나이에 흰 가운을 벗고 사제의 길로 방향을 틀었다.
의사가 다시 사제가 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약 10년. 편안한 병원 대신 가장 낮은 곳으로 가겠다는 마음이 십 년에 걸쳐 굳었다.
이태석이 톤즈로 갔다
가장 낮은 곳으로
2001년 6월, 이태석은 사제 서품을 받았다. 서품을 받자마자 이태석이 고른 곳은 남수단 톤즈였다.
톤즈는 20년 넘는 내전으로 무너진 세계 최빈국의 마을이었다. 병원도, 학교도 없었다.
이태석은 흙담을 쌓고 짚으로 지붕을 얹어 병원을 지었다. 말라리아와 콜레라가 아이들을 데려가는 마을이었다.
한센병 환자들은 마을 밖으로 쫓겨나 있었다. 이태석은 뭉개진 발을 하나하나 종이에 대고 재어, 발 모양대로 신발을 맞췄다.
그리고 이태석은 총을 쥐던 아이들에게 악기를 쥐여 줬다. 2006년, 내전의 마을 톤즈에 브라스밴드가 생겼다.
이태석에게 암이 왔다
후원을 구하러 온 길
2008년 11월, 이태석은 오랜만에 한국에 왔다. 톤즈에 병원을 더 지을 후원을 구하러 온 길이었다.
건강검진을 받은 이태석에게 대장암 4기 판정이 내려졌다. 암은 이미 간까지 퍼져 있었다.
투병 중에도 이태석이 먼저 물은 것은 자신의 병이 아니었다. 톤즈의 아이들과, 짓다 만 병원 공사였다.
2010년 1월 14일 새벽, 이태석은 마흔여덟에 세상을 떠났다.
부고가 톤즈에 닿자, 눈물을 수치로 여기던 딩카족이 이태석의 사진을 들고 울었다. 겁쟁이만 운다던 부족이었다.
제자들이 의사가 됐다
톤즈로 돌아온 아이들
이태석이 떠난 뒤, 브라스밴드와 학교를 거쳐 간 톤즈의 젊은이 40여 명이 의사·약사·의대생이 됐다.
제자 존 마옌 루벤은 한국까지 와서 의사 국가고시에 합격했다. 톤즈로 돌아가 이태석이 세운 병원에서 일하기 위해서였다.
딩카족의 눈물은 한 사람으로 끝나지 않았다. 톤즈의 병원은, 이제 이태석이 가르친 의사들이 지키고 있다.
눈물을 수치로 여기는 딩카족이 운 건, 이태석 신부가 톤즈에 병원만이 아니라 의사·약사·의대생이 된 제자 40여 명을 남기고 갔기 때문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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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상으로 보기출처 (9)
- 위키백과 — 이태석
- English Wikipedia — John Lee Tae-seok
- The Korea Herald — Two students of Priest Lee Tae-seok become medical specialists
- 나무위키 — 이태석
- SBS 취재파일 — 이태석 신부가 뿌린 사랑, 의사 57명으로 '부활'하다
- insight — '울지마 톤즈' 이태석 신부의 제자 47명 의사·의대생 됐다
- 의협신문 — 고 이태석 신부 제자 '존 마옌 루벤' 의사국시 합격
- 가톨릭타임즈 — '한국의 슈바이처' 살레시오회 이태석 신부의 생애
- 리더피아 — 딩카족은 왜 그의 죽음 앞에 눈물을 흘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