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Calypso · 한국 인물· 공유받은 글

안중근이 간수에게 준 한 장

1910년 3월 26일 뤼순. 사형이 집행되던 아침, 안중근이 자기를 감시하던 일본 헌병에게 글씨 한 장을 건넸다.

↓ 스크롤
CH. 1

사형수가 글씨를 건넸다

1910년 3월 26일, 뤼순 감옥

사형이 집행되던 아침이었다. 안중근이 종이 한 장을 건넸다. 받아 든 사람은 안중근을 법정으로 오가며 감시하던 일본 헌병이었다.

처형까지 남은 시간
5분
글씨를 건넨 것이 처형 직전이었다고 전한다

사형을 앞둔 안중근이, 자신을 지키던 적국의 군인에게 글씨를 남겼다. 종이 한 장이 70년의 시간을 건넌다.

CH. 2

낙관 자리에 손도장이 남았다

이토를 쏜 뒤, 뤼순으로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쐈다. 곧바로 붙잡혀 뤼순 감옥으로 넘겨졌다.

1910년 2월 14일, 사형이 확정됐다. 남은 시간은 두 달 남짓이었다. 안중근은 재판 내내 자신을 죄인이 아니라 대한의군 참모중장이라 불렀고, 군인으로서 남길 것을 남기기로 했다. 그래서 감방에서 붓을 잡았다.

두 달 남짓 쓴 글씨 가운데, 지금까지 전하는 것만 쉰일곱 점이 넘고, 스물여섯 점은 뒷날 보물로 지정됐다.

글씨 끝, 이름이 있어야 할 자리
왼손 손도장
약지 한 마디가 짧았다 — 1909년, 동지들과 손가락을 끊어 맹세했던 자리다

이름을 새긴 도장은 없었다. 대신 먹을 묻힌 왼손을 종이에 눌렀다. 쉰일곱 점 가운데 한 점은 감옥 밖이 아니라, 감옥 안 사람의 손에 남았다.

CH. 3

지바가 글씨를 청했다

지바 도시치라는 헌병

지바 도시치. 미야기현 시골에서 온 헌병이었다. 뤼순 감옥에서 안중근을 법정으로 데려가고 데려오는 일을 맡았다. 처음엔 이토를 죽인 죄인을 지키는 자리였다.

몇 달을 곁에서 보는 사이 지바의 태도가 달라졌다. 그리고 처형을 앞둔 마지막 아침, 지바가 글씨 한 장을 청했다. 안중근이 붓을 들어 여덟 자를 썼다.

“爲國獻身 軍人本分 — 나라를 위해 몸 바침이 군인의 본분이다”
— 안중근이 지바 도시치에게, 1910년 3월

안중근이 지바에게 건넨 말도 함께 전한다. 당신 역시 나라의 군인으로서 맡은 임무를 다했을 뿐이라고 위로했다. 이윽고 형이 집행됐다. 지바의 손에는 여덟 자가 남았다.

CH. 4

지바가 여덟 자를 간직했다

군을 떠난 헌병

안중근이 순국한 뒤, 지바 도시치는 군을 떠나 고향 미야기현으로 돌아갔다.

지바는 여덟 자를 평생 간직했다. 안중근의 사진을 걸어 두고 넋을 기렸다. 이토를 쏜 사람의 글씨를, 이토의 나라 군인이 집 안에 모셨다.

1934년 지바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글씨는 지바의 집안에 남았다. 아내에게서 조카에게로 건네지며 대를 이었다.

미야기현 구리하라, 절 대림사
위패 둘
안중근과 지바 도시치의 위패가 나란히 놓여 있다
CH. 5

글씨가 한국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여덟 자

1979년 안중근 탄생 100주년을 앞두고, 1980년 지바 도시치의 유족이 여덟 자를 한국에 돌려줬다. 위국헌신 군인본분은 보물로 지정됐다.

안중근의 손을 떠나 돌아오기까지
70년
1910년 뤼순에서 1980년 서울까지

이토 히로부미를 쏜 사람의 글씨를, 이토의 나라 헌병이 70년 동안 지켰다. 미야기현 대림사에는 오늘도 안중근과 지바 도시치의 위패가 나란히 놓여 있다.

— 끝 —
카톡 한 줄

안중근이 감옥에서 남긴 글씨를 70년 동안 지킨 사람이, 안중근을 감시하던 일본인 간수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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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4)
내일, 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