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전화가 있는데, 줄을 섰다
1994년, 집집마다 전화가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길에서 그 앞에 줄을 섰다.
집전화가 흔했는데 줄이 길었다
1994년, 어느 터미널 앞
집집마다 전화가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길가 공중전화 앞에 길게 줄을 섰다.
전화가 없어서가 아니었다. 1987년에 이미 한 집에 한 대씩 전화가 놓였다.
삐삐가 허리춤에 등장했다
1990년대 초, 허리춤의 신호
1987년, 전화 회선이 1000만을 넘어 한 집에 한 대 시대가 열렸다. 집전화는 더 흔한 물건이 됐다.
그런데 1990년대 초, 새 물건이 허리춤에 걸렸다. 무선호출기, 삐삐였다.
삐삐는 받기만 했다. 누가 불렀는지 번호만 뜰 뿐, 삐삐로는 한마디도 말할 수 없었다.
삐삐가 울리면, 답은 삐삐 밖에서 해야 했다. 가장 가까운 전화를 찾아야 했다.
삐삐를 찬 사람은 전화에 매였다
울리면 뛰었다
삐삐가 울린 순간, 삐삐를 든 사람은 집까지 기다리지 못했다. 지금 누가, 왜 불렀는지 당장 알아야 했다.
그래서 길에서 가장 가까운 공중전화로 뛰었다. 삐삐를 찬다는 건, 공중전화 앞에 서기로 한 것과 같았다.
“8282”
1004는 천사, 486은 사랑해. 숫자로 남긴 말은, 결국 공중전화 앞에서 풀어야 했다.
긴 줄의 정체는 삐삐였다
줄, 눈총, 그리고 주먹질
공중전화 앞에는 늘 줄이 길었다. 통화가 길어지면, 삐삐를 든 뒷사람의 눈총이 따라왔다.
전화를 빨리 끝내지 않는다는 시비가 주먹질로 번지는 일도 흔했다.
유동인구가 많은 곳은 동전이 통 안에 가득 차 전화가 먹통이 됐다. 그래서 동전 없이 걸 수 있는 카드식 공중전화가 대세가 됐다.
줄의 정체는 전화가 없어서가 아니었다. 손목의 삐삐가, 공중전화 앞으로 사람을 불러 세운 것이었다.
1998년, 줄이 사라졌다
삐삐가 진 자리
1998년 9월, 이동전화 가입자가 삐삐 가입자를 넘어섰다.
전화가 주머니 안으로 들어오자, 공중전화 앞 줄도 함께 사라졌다.
길게 늘어섰던 공중전화 줄은, 전화가 없던 시절의 풍경이 아니었다. 전화를 손에 쥐기 직전, 가장 붐볐던 마지막 줄이었다.
90년대 공중전화 앞 그 긴 줄, 전화가 없어서가 아니라 삐삐 때문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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