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의 진짜 스타는 배우가 아니었다
1938년 8월, 경성 우미관 화장실에서 한 남자가 죽은 채 발견됐다. 20년 전, 그를 보러 극장이 미어졌다.
관객은 배우를 보러 오지 않았다
스크린 옆, 어둠 속의 남자
1920년대 경성. 극장 스크린 옆 어둠 속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관객은 화면 속 배우가 아니라, 그 남자의 목소리를 들으러 왔다.
화면은 소리가 없었다. 배우는 입만 벙긋거렸다. 대신 스크린 옆 남자가 모든 인물의 목소리가 되어 울고 웃었다.
1910년, 극장에 변사가 등장했다
목소리가 곧 영화였다
1910년 무렵, 경성에 상설 영화관이 늘었다. 화면엔 자막도 소리도 마땅치 않았다. 누군가 대신 이야기를 풀어줘야 했다.
빈자리를 채운 직업이 변사였다. 변사는 줄거리를 미리 일러주고, 상영 내내 인물마다 목소리를 바꿔 대사를 입혔다. 같은 필름도 변사의 입을 거쳐야 이야기가 됐다.
우미관·단성사·조선극장 같은 서울 극장들은 변사를 두셋씩 두고 번갈아 무대에 올렸다. 변사의 이름은 신문 광고와 잡지에 배우보다 크게 실렸다.
변사는 화면의 주인이 되기로 했다
필름을 설명하다, 필름을 지배하다
변사는 화면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필름에 없는 대사를 지어 넣고, 억양과 침묵으로 장면의 뜻을 바꿨다. 같은 영화도 변사가 누구냐에 따라 다른 영화가 됐다.
정점에 선 변사가 서상호였다. 서상호는 우미관에서 1916년 조선에 걸린 활극 <명금>을 해설하며 굵은 목소리로 열변을 토했고, 자기만의 춤까지 만들어 관객의 혼을 빼놓았다.
극장 관리자에게 서상호는 곧 흥행이었다. 1918년 단성사가 활동사진관으로 문을 열며 서상호를 우미관에서 빼갔다. 서상호를 데려오는 일이 곧 관객을 데려오는 일이었다.
그러나 변사의 입은 위험했다. 극장 뒤편엔 임석경관이 앉아 변사가 검열 대본을 벗어나지 않는지 감시했다. 막간에 불온한 말을 한 변사는 붙들려 갔고, 상영이 통째로 멈추기도 했다.
1935년, 화면이 스스로 말했다
필름이 목소리를 얻던 날
1930년대 초, 서양에서 소리 나는 영화가 들어왔다. 큰 극장들은 발성영화 상영 장비를 사들였다. 화면이 스스로 말하기 시작했다.
1935년, 조선 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이 단성사에 걸렸다. 배우들이 화면 안에서 직접 목소리를 냈다. 스크린 옆에서 목소리를 팔던 사람은 더 필요 없어졌다.
변사들은 만담가로, 라디오 성우로, 극장 지배인으로 흩어졌다. 목소리 하나로 극장을 채우던 시대가 닫혔다.
정점에 섰던 서상호는 아편에 무너졌다. 전성기를 보낸 우미관 언저리를 떠돌며 구걸했고, 1938년 8월 자신이 왕이었던 우미관 화장실에서 죽은 채 발견됐다.
목소리는 화면 안으로 들어갔다
화면이 말을 배운 대가
무성영화 시대의 극장에서 진짜 주인공은 화면 밖에 서 있었다. 배우의 입이 아니라 변사의 목소리가 극장을 채웠다.
화면이 스스로 말을 배우자, 목소리를 입히던 직업은 통째로 사라졌다. 서상호가 죽은 1938년의 우미관에는 이제 변사의 자리가 없었다.
무성영화 시대 극장의 진짜 스타는 배우가 아니라 스크린 옆에서 목소리를 입히던 변사였는데, 영화가 말을 배우자 변사라는 직업 자체가 통째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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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상으로 보기출처 (13)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변사
- Korean Film Archive (Google Arts & Culture) — 변사, 시대를 증언하는 목소리
- The Korea Herald — Film's mark on colonial Korea
- 우수진, 무성영화 변사의 공연성과 대중연예의 형성 (KCI)
- 우미관과 <명금> 그리고 서상호 (brunch)
- 명금(The Broken Coin) 조선 최초 상영 1916.6.23 우미관 — DH Edu (AKS)
- 춘향전(1935) 한국 최초 발성영화 — 위키백과
- 우미관·단성사 극장사, 서상호 스카우트 — 서울시 미디어허브
- '변사' 청중의 마음을 울리고 웃긴 최초의 연예인 — 국가유산청
- 배우보다 몸값 높은 조선 최고의 변사는? (변사 월급 수치 2차 출처) — ZUM 뉴스
- 무성영화 시대의 극장과 활동사진 변사 (변사 월급 70~80원 vs 배우 40~50원) — 교보생명 하루잇문학
- 서상호 (변사, 1888~1938) — 나무위키 (1938.8 우미관 화장실 아편 사망·1925 몰락)
- [최초로 본 한국영화 100년] 근대 매체가 낳은 新 연예인 '변사' — 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