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Calypso · 사라진 풍습· 공유받은 글

이발소마다 걸린 그림, 감자가 아니었다

이발소마다 걸렸던 밀레의 부부 그림. 달리의 요청으로 파리 루브르가 감자 바구니 밑에 X선을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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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 1

부부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발소 거울 위, 그 그림

1960년대 한국, 어느 이발소에 들어가도 거울 위에는 같은 그림이 걸려 있었다. 해질녘 들판에서 농부 부부가 고개를 숙인 그림.

프랑스 화가 밀레의 만종이었다. 부부 발치에는 감자 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면도 거품을 얼굴에 바른 채, 사람들은 매달 같은 부부를 올려다봤다. 감자 바구니 앞에서 부부가 무엇을 기도하는지, 아무도 묻지 않았다.

CH. 2

이발소는 서민의 응접실이었다

면도 의자 위의 미술관

이발소는 손님이 의자에 앉아 넋두리를 풀면 이발사가 맞장구를 쳐주던 곳이었다. 서민들이 면도를 받으며 세상사를 이야기하고 위로를 받던 공간이었다.

1960년대 중반부터는 머리를 깎는 일은 남자 이발사가, 면도는 면도사라 하여 여자가 맡는 곳이 많아졌다. 뜨거운 수건과 날 선 면도날이 얼굴을 지나가는 몇 분이 하루의 사치였다.

미술관 문턱을 넘어본 적 없는 사람들에게, 이발소 벽의 복제화가 유일한 그림이었다. 밀레의 만종과 이삭 줍는 사람들, 물레방아 도는 초가집이 단골 소재였다.

물레방아 그림 한편에는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라'는 푸시킨의 시가 적혀 있기도 했다. 벽에 걸린 그림과 시가 면도 의자에 앉은 사람을 위로했다.

밀레는 프랑스 시골 농부의 아들이었다. 화려한 신화나 귀족 대신, 밀레는 들에서 일하는 농부를 그렸다. 이발소에 앉은 서민들과 같은 사람들이었다.

CH. 3

밀레는 어릴 적 기억을 그렸다

저녁 종이 울리면

만종의 부부가 고개를 숙인 것은 저녁 교회 종소리 때문이었다. 밀레는 어린 시절 할머니와 들에서 일했다. 저녁 종이 울리면 할머니는 늘 일손을 멈추게 했다.

“만종의 착상은 할머니가 떠올라서였다. 들에서 일하다 종소리가 들리면, 할머니는 늘 우리를 멈춰 세우고 가엾은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게 하셨다.”
— 장프랑수아 밀레

밀레는 완성한 그림에 처음 '감자 수확을 위한 기도'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러나 그림은 팔리지 않았다.

밀레는 제목을 만종으로 바꾸고, 지평선에 작은 교회 종탑을 그려 넣었다. 죽은 이를 위한 기도가 저녁 기도로 바뀐 셈이었다.

그런데 감자 바구니가 놓인 자리에는, 처음 다른 무언가가 그려져 있었다.

CH. 4

루브르가 감자 바구니에 X선을 댔다

감자 바구니 밑

수십 년 뒤, 화가 살바도르 달리가 만종을 두고 다른 주장을 폈다. 부부가 감자 바구니가 아니라 죽은 아이 앞에서 애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1963년, 달리는 '밀레 만종의 비극적 신화'라는 책을 냈다. 그러면서 루브르 박물관에 만종을 X선으로 찍어 달라고 요청했다.

루브르가 실제로 X선을 댔다.

감자 바구니를 덮은 짙은 물감 아래에서, 길쭉한 네모난 형태의 밑그림이 드러났다. 달리는 이 밑그림을 아이의 관이라 불렀다.

밀레가 처음 관을 그렸다가, 죽음이 담긴 그림은 팔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관 위를 덧칠했다는 해석이 뒤따랐다. 이발소마다 걸린 저녁 기도가, 처음엔 장례였을지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CH. 5

이발소도 그림도 사라졌다

거울 위는 비었다

1980년대에 들어 칸막이를 두른 밀실 이발소가 생기고, 골목의 삼색등은 하나둘 꺼졌다. 요즘의 바버샵 벽에는 만종이 없다.

미술관에 가본 적 없던 사람들이, 면도를 받으며 매달 프랑스 농부 부부와 함께 고개를 숙였다. 감자 바구니 앞에서인지 아이의 관 앞에서인지 모른 채로.

만종이 걸린 이발소를 첫 미술관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남았다. 그림은 내려졌지만, 감자 바구니 밑에서 무엇이 드러났는지는 이제 안다.

— 끝 —
카톡 한 줄

이발소마다 걸렸던 밀레의 만종, 그 감자 바구니 밑에 달리가 관이라 부른 밑그림이 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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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