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녀가 왕비가 됐다가 사약을 받았다
1701년 10월 8일, 창경궁. 한때 조선의 왕비였던 여자가 사약을 받았다. 하루 전, 이상한 법 하나가 생겼다.
왕비였던 장씨에게 사약이 내려졌다
1701년 10월 8일, 창경궁 취선당.
한때 조선의 국모였던 여자가 왕의 명으로 사약을 받았다. 이름은 장씨, 훗날 장희빈으로 불린 사람이다.
궁녀로 궁에 들어온 장씨가 어떻게 왕비까지 올랐고, 다시 어떻게 사약을 받게 됐나.
장씨는 중인 궁녀로 궁에 들어왔다
1659년, 역관의 딸로 태어나다
장씨는 1659년, 중인 역관 집안에서 태어났다. 양반이 아니었다. 어린 나이에 궁녀로 차출돼 궁에 들어갔다.
궁녀의 앞날은 오직 하나에 달려 있었다. 왕의 눈에 드는 것, 그리고 아들을 낳는 것. 다른 길은 없었다.
장씨가 궁에 있던 시절, 조정은 서인과 남인으로 갈려 있었다. 숙종은 한쪽에 힘을 실었다가 하루아침에 갈아치우는 '환국'으로 신하들을 다뤘다. 왕의 여자들도 붕당 싸움의 말이 되곤 했다.
1686년, 장씨는 정식 후궁이 되었다. 종4품 숙원. 그리고 1688년 10월, 왕자를 낳았다. 숙종이 즉위한 지 14년, 왕실이 오래 기다린 첫 아들이었다.
아들이 원자가 되자 장씨가 왕비가 됐다
1689년, 인현왕후가 폐위되다
1688년에 태어난 왕자가 모든 것의 씨앗이었다. 숙종은 1689년 1월, 갓 돌 지난 왕자 윤을 원자로 정하고, 장씨를 정1품 빈으로 올렸다.
서인들이 원자 책봉이 이르다며 반대했다. 숙종은 반대한 서인을 조정에서 쓸어냈다. 이 사건이 기사환국이다. 서인의 영수 송시열도 이때 사약을 받았다.
1689년 5월, 인현왕후 민씨가 폐위됐다. 빈 국모 자리에 장씨가 들어섰다. 중인 궁녀 출신이 조선의 왕비가 된 것이다.
왕비 자리는 장씨가 스스로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들이 세자인 한 어머니는 왕비였고, 남인이 힘을 잃는 순간 왕비 자리도 함께 흔들릴 운명이었다.
장씨는 다시 희빈으로 강등됐다
1694년, 왕비가 다시 후궁으로
왕비가 된 지 5년, 판이 다시 뒤집혔다. 1694년 숙종은 남인을 내치고 서인을 불러들였다. 폐위됐던 인현왕후가 복위했고, 왕비 장씨는 옛 작호인 희빈으로 강등돼 취선당으로 돌아갔다.
장씨의 자리는 아들의 자리와 함께 갔다. 세자의 어머니였지만 국모는 다시 민씨였다. 그리고 1701년 8월, 인현왕후 민씨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인현왕후가 죽자 숙빈 최씨가 고했다. 장씨가 취선당 서쪽에 신당을 차려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것이다. 장씨는 아들의 두창이 낫기를 빌던 신당이라 했다. 두 말 중 무엇이 사실이든, 판결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숙종은 장씨에게 자진을 명했다. 그런데 사약이 내려지기 하루 전, 숙종은 붓을 들어 법 하나를 새로 만들었다.
무고의 옥으로 남인은 조정에서 완전히 쫓겨났다. 장씨에게 내린 자진의 명과 새 법은 하루 사이였다. 왕비까지 올랐던 신분의 문을, 숙종이 스스로 법으로 닫아버린 것이다.
장씨의 아들은 왕이 됐다
1720년, 아들이 왕위에 오르다
장씨가 죽고 19년 뒤, 아들 윤이 왕위에 올랐다. 조선의 20대 임금 경종이다.
경종은 병약했고, 재위 4년 만에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났다. 왕이 된 아들은 뒤를 이을 아들을 남기지 못했다.
숙종이 사약과 함께 만든 법, 후궁은 왕비가 될 수 없다는 조항은 조선이 문을 닫을 때까지 남았다. 궁녀에서 왕비까지 올랐던 단 한 사람의 이름을, 조선은 법으로 봉해두었다.
장희빈이 사약을 받은 건 왕비 자리를 둘러싼 치정극이 아니라, 붕당을 번갈아 쳐내던 숙종의 정치 게임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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