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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ypso · 인물 비화· 공유받은 글

독일 공녀가 남편의 왕관을 빼앗았다

1762년 7월, 상트페테르부르크. 예카테리나가 근위대 군복을 입고 말에 올랐다. 남편의 왕관을 빼앗으러.

↓ 스크롤
CH. 1

예카테리나는 러시아인이 아니었다

러시아 피 한 방울 없이

1762년 7월, 상트페테르부르크. 예카테리나가 근위대 군복을 입고 말에 올랐다. 서른셋의 여자가 향한 곳은 남편의 궁전이었다.

예카테리나는 러시아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로마노프 왕가의 피도 섞이지 않았다. 왕관에 대한 법적 권리는 처음부터 없었다.

예카테리나의 러시아 왕가 혈통
0방울
왕위 계승 서열에 이름조차 없었다
CH. 2

소피가 예카테리나로 다시 태어났다

작은 공국에서 온 신붓감

1744년, 엘리자베타 여제가 후계자의 신붓감을 불렀다. 독일의 작은 공국 안할트-체르프스트에서 온 공녀 소피였다.

소피는 정교회로 개종하며 이름을 예카테리나로 바꿨다. 러시아어를 익혔다. 이듬해, 열여섯에 후계자 표트르와 결혼했다. 표트르는 러시아보다 프로이센을 사랑했다.

결혼은 오래도록 차가웠다. 예카테리나는 궁정에서 겉돌았고, 열일곱 해 동안 책을 읽으며 버텼다.

태어난 곳
독일의 작은 공국 안할트-체르프스트
시집온 곳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 러시아
CH. 3

예카테리나가 새벽에 말을 몰았다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1762년 1월, 엘리자베타 여제가 죽었다. 남편이 표트르 3세로 즉위했다. 예카테리나의 자리는 하루아침에 위태로워졌다.

표트르 3세는 러시아가 이기고 있던 전쟁을 멈추고, 프로이센에 점령지를 돌려줬다. 승리를 눈앞에서 빼앗긴 근위대가 등을 돌렸다.

황제는 예카테리나와 이혼하려 했다. 수녀원에 가두고 정부 옐리자베타 보론초바와 결혼하려 한다는 말이 돌았다. 아들 파벨을 사생아로 선언한다는 소문까지 나왔다.

1762년 7월 8일 밤, 공모자 한 명이 붙잡혔다. 고문을 받으면 계획 전체가 드러날 판이었다. 남은 길은 지금 움직이는 것뿐이었다.

7월 9일 새벽, 알렉세이 오를로프가 예카테리나를 깨웠다. 예카테리나는 근위연대로 달려가 군복을 입고 병사들 앞에 섰다. 성직자들이 예카테리나를 유일한 군주로 세웠다.

예카테리나는 병사들에게 남편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달라 청했다. 근위대는 예카테리나를 여제로 받들었다.

CH. 4

표트르 3세가 여드레 만에 죽었다

즉위 여드레 뒤, 로프샤

표트르 3세는 다음 날 왕관을 내려놓았다. 즉위한 지 반년 만이었다. 폐위된 황제는 로프샤의 저택으로 옮겨졌다.

1762년 7월 17일, 로프샤에서 표트르 3세가 죽었다. 예카테리나가 왕좌에 앉은 지 여드레째였다. 마지막까지 곁을 지킨 사람은 알렉세이 오를로프였다.

공식 사인은 '치질성 복통'으로 발표됐지만, 볼테르마저 믿지 않았다.

“우리도 우리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모르겠습니다.”
— 오를로프가 보냈다고 전해지는 편지 (원본 소실·진위 논란)

왕관에 아무 권리가 없던 독일 공녀가, 권리를 쥔 남편이 사라진 자리에 홀로 남았다. 심지어 아들 파벨의 핏줄이 예카테리나보다 왕좌에 가까웠다.

CH. 5

러시아는 예카테리나를 대제라 불렀다

서른네 해

예카테리나는 1796년 죽을 때까지 러시아를 다스렸다. 서른네 해였다. 아들 파벨은 서른네 해가 다 지난 뒤에야 왕관을 물려받았다.

러시아 역사에서 '대제'라 불린 군주
2명
한 명은 러시아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표트르 대제와 예카테리나. 러시아가 '대제'라 부른 두 사람 중 하나는 러시아 태생이 아니었고, 왕관에 대한 권리도 없이 시작했다.

— 끝 —
카톡 한 줄

러시아가 '대제'라 부른 군주는 딱 둘, 그중 하나는 남편을 끌어내리고 왕좌에 앉은 독일 공녀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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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8)
내일, 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