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Calypso · 인물 비화· 공유받은 글

소년왕을 묻은 자는 역적이었다

1457년 가을 영월, 열일곱 소년왕이 강가에 죽어 있었다. 며칠이 지나도 아무도 그를 거두지 못했다.

↓ 스크롤
CH. 1

아무도 시신에 손대지 못했다

1457년 가을, 영월

강원도 영월, 강가에 열일곱 소년의 시신이 놓여 있었다. 한때 조선의 여섯 번째 임금이던 사람이다.

여러 날이 지나도록 마을 사람 누구도 소년왕의 시신에 손대지 못했다. 손을 대면 자기가 역적이 되기 때문이었다.

죽은 소년왕은 살아 있는 임금 세조가 강원도 산골로 내쫓은 조카였다. 조카의 시신을 누가 감히 거두겠는가. 소년왕이 어쩌다 영월 강가에 이르렀는지 알려면, 5년 전으로 가야 한다.

CH. 2

단종은 열두 살에 임금이 되었다

임금이 된 아이

1452년, 아버지 문종이 왕위에 오른 지 2년 만에 죽었다. 뒤를 이어 왕이 된 단종은 열두 살이었다. 어린 임금 곁을 김종서 같은 신하들이 지켰다.

1453년, 숙부 수양대군이 정변을 일으켰다. 김종서를 베고 조정을 손에 넣었다. 계유정난이었다. 열세 살 임금은 이름만 임금이 되었다.

왕위에 오른 나이
12세
곁의 신하들은 숙부의 칼에 스러졌다

1455년, 힘을 잃은 단종은 왕위를 숙부에게 넘겼다. 열다섯 살, 상왕으로 물러난 소년이었다. 숙부는 세조가 되었다. 물러난 소년왕에게는 아직 갈 곳이 남아 있었다.

CH. 3

엄흥도가 밤에 시신을 지고 갔다

묻기로 한 사람

1456년, 성삼문을 비롯한 여섯 신하가 단종을 다시 왕으로 세우려다 발각돼 죽었다. 사육신이다. 사육신 사건의 여파로 1457년,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돼 영월 청령포로 유배됐다.

그리고 1457년 가을, 열일곱의 단종은 영월에서 숨을 거뒀다. 시신은 거두는 이 없이 버려졌다. 임금의 시신에 손대는 일이 곧 역모이던 때였다.

영월의 호장 엄흥도가 나섰다. 고을의 아전을 이끄는 자리였다. 집안 사람들이 후환을 두려워하며 말렸다. 엄흥도는 이렇게 답했다.

“선을 행하다 화를 입는 것은 내가 달게 받는 바다.”
— 엄흥도

엄흥도는 밤을 틈타 소년왕의 시신을 지고 동을지산 자락, 집안 땅에 묻었다. 그리고 영월을 떠나 몸을 숨겼다.

CH. 4

무덤은 240년간 이름이 없었다

역적의 무덤이 왕릉이 되기까지

시신을 묻은 대가로 엄흥도의 집안은 흩어졌다. 후손들은 오래 숨어 살았다. 소년왕을 묻었다는 사실 자체가 죄가 되던 세월이었다.

소년왕이 묻힌 자리는 오래도록 임금의 이름을 얻지 못했다. 임금의 무덤이라 부를 수도 없는 무덤이었다. 무덤의 주인이 임금이 아니었으므로.

1698년, 숙종이 노산군을 다시 임금으로 복위시켰다. 죽은 지 241년 만이었다. 묘호는 단종, 능호는 장릉이 되었다. 역적이 묻은 시신이 임금의 무덤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서울·경기 밖 유일한 조선 왕릉
1기
영월 장릉 — 엄흥도가 목숨 걸고 묻은 자리
CH. 5

장릉은 지금도 영월에 있다

영월에 남은 것

장릉은 지금도 영월에 있다. 조선 왕릉 가운데 유일하게 서울과 경기도를 벗어난 곳에 놓인 무덤이다. 왕릉이 영월에 선 이유는 하나, 엄흥도가 소년왕의 시신을 묻은 자리이기 때문이다.

엄흥도는 1876년 충의공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소년왕을 묻어 역적이 될 뻔한 호장의 이름이, 4백 년을 건너 충절의 이름으로 남았다.

— 끝 —
카톡 한 줄

조선 왕릉 중 딱 하나만 서울·경기를 벗어나 영월에 있는데, 목숨 걸고 소년왕 시신을 묻은 호장 한 명 때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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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10)
내일, 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