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객은 죽일 얼굴을 몰랐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경복궁. 자객들이 죽이러 온 사람은 하나인데, 그 얼굴을 아무도 몰랐다.
자객은 표적을 몰랐다
얼굴 없는 표적
1895년 10월 8일 새벽, 경복궁 건청궁. 일본 자객 수십 명이 담을 넘어 들었다. 죽여야 할 사람은 단 한 명. 그런데 그들은 그 얼굴을 몰랐다.
자객들이 찾던 사람은 조선의 왕비, 명성황후였다. 하지만 명성황후의 얼굴을 아는 자객은 아무도 없었다.
조선이 러시아로 기울었다
일본이 토해낸 땅
1895년 봄,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이겼다. 하지만 러시아·프랑스·독일이 함께 나서자, 청에게서 빼앗은 랴오둥반도를 도로 내놓아야 했다.
명성황후는 삼국간섭을 놓치지 않았다. 이긴 일본도 러시아 앞에서는 물러섰다. 조선 왕실은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밀어내려 했다.
일본은 조선을 놓치는 것이 두려웠다. 1895년 여름, 새 공사가 서울에 부임했다. 예비역 육군 중장 미우라 고로였다.
미우라가 사냥을 지시했다
여우 사냥
미우라 고로는 부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결심했다. 왕비를 없앤다. 미우라에게 명성황후는 조선을 러시아 쪽으로 끌고 가는 손이었다.
미우라는 조선에 흘러든 일본 낭인들을 불러 모았다. 신문 기자, 칼잡이, 떠돌이들이 섞여 있었다. 여기에 일본식으로 훈련받은 조선 훈련대까지 끌어들였다.
“여우 사냥.”
1895년 10월 8일 새벽, 자객들은 경복궁 담을 넘었다. 향하는 곳은 왕비의 처소 옥호루였다.
자객이 궁녀까지 베었다
옥호루에 든 자객들은 곧 막혔다. 눈앞에 여인이 여럿인데, 누가 왕비인지 가려낼 수가 없었다. 명성황후의 얼굴을 아는 자객은 없었다.
자객들은 확실히 하려 했다. 왕비로 보이는 궁녀 서너 명을 함께 베었다. 누구 하나는 왕비이길 바라며 칼을 휘둘렀다.
명성황후는 살아서 좀처럼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궁 밖 사람도, 궁에 든 자객도 명성황후의 얼굴을 알 길이 없었다. 평생 모습을 감춘 국모라, 오늘날까지 명성황후를 확인해 주는 사진은 한 장도 남지 않았다.
왕비를 죽인 자객들은 시신을 경복궁 뒤 소나무 숲으로 끌고 갔다. 석유를 붓고 불을 놓았다.
재판은 모두 무죄로 끝났다
무죄
일본은 미우라 고로와 관련자들을 히로시마로 불러 재판에 부쳤다. 왕비를 죽인 자들은 한 사람도 처벌받지 않고 풀려났다.
고종은 이듬해 2월, 궁을 빠져나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옮겼다. 조선의 임금이 남의 나라 공관에서 나랏일을 봤다.
명성황후를 죽이러 온 자객들은 끝내 왕비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명성황후는 죽는 순간까지, 그리고 죽은 뒤에도 얼굴을 감춘 채 남았다.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는 죽이러 온 자객조차 얼굴을 몰랐을 만큼 모습을 안 드러냈고, 그래서 지금도 확정된 사진이 한 장도 안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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