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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ypso · 의학·신체· 공유받은 글

위에 구멍이 난 채 58년

1822년 6월, 매키낵 섬. 스물 남짓 뱃사공의 옆구리에 총이 터졌고, 그 구멍은 평생 닫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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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 1

1822년 매키낵 섬, 산탄총이 오발됐다

옆구리에 뚫린 구멍

1822년 6월 6일, 매키낵 섬의 모피 상점. 스물 남짓 뱃사공 알렉시스 생마르탱의 옆구리에서 산탄총이 오발됐다. 총구는 코앞이었다.

요새 군의관 윌리엄 비몬트가 몇 분 만에 달려왔다. 상처를 살피고는 살지 못할 상처라고 적었다.

생마르탱은 죽지 않았다. 상처는 아물면서 위장으로 통하는 구멍 하나를 남겼다. 구멍은 평생 닫히지 않았다.

CH. 2

생마르탱은 모피를 나르던 뱃사공이었다

구멍을 들여다본 의사

1820년대 매키낵 섬은 모피 교역의 길목이었다. 생마르탱은 카누로 짐승 가죽을 실어 나르던 프랑스계 캐나다 뱃사공이었고, 비몬트는 요새에 배속된 군의관이었다.

비몬트는 생마르탱을 자기 집에 들여 몇 해 동안 상처를 돌봤다. 아무는 자리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위장 벽이 바깥 살에 그대로 붙어버린 것이다.

덮개 하나가 구멍을 막고 있어서, 손가락으로 밀면 열렸다. 비몬트는 열린 구멍으로 살아 있는 위장 안을 그대로 들여다봤다. 산 사람의 위 속을 이렇게 직접 본 의사는 없었다.

CH. 3

1825년 9월, 생마르탱이 달아났다

실 끝에 매단 고깃점

1825년, 비몬트가 실험을 시작했다. 명주실 끝에 고깃점과 빵을 매달아 구멍으로 위 속에 내려 넣고, 한 시간마다 끌어올려 얼마나 삭았는지 적었다. 구멍에서 위액을 직접 받아내 유리병에 담기도 했다.

“나무를 패고 짐을 나르는 하인의 일을 상처의 불편 없이 다 해냈다.”
— 윌리엄 비몬트의 실험 기록 (생마르탱은 계약으로 매인 하인이었다)

같은 해 9월, 생마르탱이 계약을 깨고 요새를 떠났다. 캐나다로 돌아가 결혼하고 아이들을 낳았다. 실험 대상이 되기를 스스로 그만둔 것이다.

CH. 4

생마르탱이 의사보다 오래 살았다

부른 사람과 달아난 사람

비몬트는 생마르탱을 놓지 않았다. 1829년, 몬트리올 근처에서 가난하게 살던 생마르탱을 다시 불러들여 실험을 이어갔다. 두 사람의 실험은 1833년까지, 모두 238번에 이르렀다.

1833년, 비몬트가 실험 기록을 책으로 펴냈다. 근대 소화생리학은 비몬트의 책 한 권에서 시작됐고, 비몬트는 '위 생리학의 아버지'로 남았다. 책 제목에도, 학문의 이름에도 생마르탱의 이름은 없었다.

1853년, 비몬트가 얼음 덮인 계단에서 미끄러져 죽었다. 위에 구멍이 뚫린 생마르탱은 비몬트가 죽은 뒤로 27년을 더 살았다. 실험한 의사가 먼저 갔고, 실험당한 남자가 남았다.

CH. 5

1880년, 가족이 생마르탱을 깊이 묻었다

8자 깊이의 무덤

1880년 6월 24일, 퀘벡의 생토마드졸리에트. 생마르탱이 일흔여덟에 숨졌다. 총에 맞은 지 58년 뒤였다.

의사들이 마침내 생마르탱의 위장을 손에 넣으려 했다. 육군 의학박물관까지 나서서 위를 보존하겠다고 했다.

가족은 시신이 상하도록 며칠을 둔 뒤, 돌을 쌓아 8자 깊이에 묻었다. 무덤에는 이름도 남기지 않았다. 살아서 실험대에 올랐던 몸을, 죽어서는 어느 의사도 열지 못하게 한 것이다.

— 끝 —
카톡 한 줄

근대 소화생리학은 어느 모피 뱃사공 위에 난 구멍에서 시작됐고, 정작 그 뱃사공은 죽어서까지 해부를 피해 8자 깊이에 묻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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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9)
내일, 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