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도망가라 한 의사
부산. 장기려가 가난한 환자에게 병원 뒷문을 가리켰다. 밤에 몰래 나가라고, 병원비는 자기가 냈다.
장기려가 뒷문을 열어 두었다
밤에 도망가라 한 의사
부산의 한 병원. 한 의사가 입원한 가난한 환자를 조용히 불러 병원 뒷문을 가리켰다. 밤에 몰래 나가라고 했다.
장기려는 돈이 없는 환자에게 치료비를 받지 않으려고, 자기 병원의 뒷문을 그렇게 열어 두곤 했다.
“집에 가서 푹 쉬고, 돈 없어도 괜찮으니 며칠 뒤에 꼭 다시 오세요.”
장기려는 가족을 북에 두고 왔다
전쟁이 만든 병원
1950년 12월, 장기려는 평양의 외과의사였다. 1·4후퇴 때 부인과 다섯 자녀를 평양에 남기고, 둘째 아들만 데리고 피난길에 올랐다.
1951년 6월, 장기려가 닿은 부산 영도에는 피난민이 넘쳤다. 임시수도로 사람이 몰렸고, 병원비를 낼 수 있는 이는 드물었다.
교회 창고에 복음진료소가 문을 열었고, 장기려가 초대 원장을 맡아 무료로 진료했다. 돈이 없는 사람을 그냥 돌려보내지 않았다.
장기려가 월급을 헐어 병원비를 냈다
한 사람의 주머니
장기려는 치료비 없는 환자의 몫을 자기 급여에서 가불해 냈다. 병원은 대납을 계속 두고 볼 수 없었다. 뒷문은 그렇게 열렸다.
하지만 한 사람의 주머니로 밀려드는 환자를 다 감당할 수는 없었다. 대신 내주는 돈에는 끝이 있었다.
1968년, 채규철이 덴마크의 협동조합 이야기를 장기려에게 전했다. 여럿이 조금씩 모아 두면, 누가 아플 때 함께 모은 돈으로 서로를 치료한다는 것이었다.
1968년 5월 13일, 장기려는 부산의 교회 교인들과 함께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세웠다. 한 사람이 대신 내는 대신, 모두가 나눠 내기로 했다.
청십자가 정부보다 먼저였다
모두가 나눠 낸 돈
보험료는 한 달에 담배 한 갑 값 남짓이었다. 사상가 함석헌이 1호 회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처음엔 또 무슨 속임수냐는 눈길도 있었다. 그래도 조합은 버텼고, 1974년 말에는 4,648세대 19,730명이 가입해 있었다.
1977년, 정부가 500인 이상 큰 사업장부터 의료보험을 시작했다. 온 국민이 다 드는 전국민 의료보험은 1989년에야 왔다.
청십자는 그보다 앞서 사람들이 스스로 만든 한국 첫 의료보험 조합이었고, 뒤에 온 정부 제도의 선구로 꼽힌다. 밤에 뒷문으로 도망가야 했던 병원비를, 이제는 더 많은 사람이 조금씩 나눠 내고 있었다.
장기려는 집 한 칸 없이 떠났다
옥탑방의 의사
제도를 만든 장기려는 정작 집 한 칸 두지 않았다. 1979년 막사이사이상을 받았지만, 세상을 떠날 때까지 부산 복음병원 위 20여 평 옥탑방에서 살았다.
1985년, 첫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열렸다. 정부가 장기려에게 특별한 만남을 제안했지만, 장기려는 남들과 똑같지 않은 자리라면 가지 않겠다며 거절했다. 평양에 두고 온 부인을 끝내 다시 만나지 못했다.
환자가 밤에 도망치지 않아도 되는 나라를 만든 의사는, 1995년 성탄절에 복음병원 옥탑방에서 눈을 감았다.
지금 우리가 내는 건강보험, 뿌리를 캐보면 환자 병원비를 몰래 대신 내주던 의사 한 명한테 닿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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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8)
- 부산일보 — 가난한 환자가 도망가도록 병원 뒷문 열어준 '바보 의사' 장기려
- 우리역사넷(국사편찬위원회) — 장기려 1911~1995 / 복음병원·청십자의료보험
- 기독일보 — '바보 의사' 장기려 (청십자 1968-05-13, 함석헌 1호 회원, 723명·23개 교회)
- 위키백과 — 장기려 (1·4후퇴 월남, 막사이사이상, 옥탑방, 1995 성탄절 별세)
- 의협신문 — 고신대복음병원 개원 60년 (1951-06-21 영도 복음진료소, 하루 60→100명)
- 국가기록원 — 1989년 7월 1일 전국민 의료보험 실시 (1977 500인 이상 → 1989 전국민)
- 의협신문 — 우리나라 건강보험제도 도입 배경 (1977 사업장 500인↑ 단계적 확대)
- 위클리오늘 — 성산 장기려, 고결한 가족사랑 (1985 이산가족 특별상봉 거절)